팔아야 하는 자와 사야 하는 자 그리고 상도덕 p1
"네! 감사합니다!"
지만이는 그렇게나 간절했던 미술작품을 구했다.
‘물방울과 바위의 길’
이 작품은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가치를 매겼던 시리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을 잘만 팔면 몇 년 동안은 돈 걱정이 없이 신나게 일하면서 살 수 있다. 이 돈으로 강남에 가장 좋은 집 한 채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생존작가 중 은둔형으로 아무도 안 만나는 작가이다. 자기 아들을 통해서만 그림을 내놓지만, 아들조차도 얼굴을 보기 힘들다. 이 작가의 작품을 거의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만이가 우연히 아들을 만나 작가의 작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전에 마켓에 나온 적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다. 작가 지인의 소장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컬렉터의 손을 거치다가 작가의 아들을 통해 지만이에게로 들어왔다. 물론 팔리면 상당 수익을 작가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작가의 작품을 받았다는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적이었다.
지만이는 당장 돈이 필요하다. 잘못하다가는 다음 달 갤러리 렌트도 못 내고 집에서도 나갈뿐더러 굶어 죽을 것이다.
갤러리를 운영하면 사람들이 잘 산다 생각한다.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하지만 현실은 치열하다. 특히 지만이 같은 조그마한 갤러리 주인은 더더욱 그렇다.
우선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이 작품을 원하면서도 가장 돈을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래리는 열심히 주식 표를 들여다본다. 하염없이 주식을 사고팔고 하면서 열심히 클릭질을 한다. 그 옆 모니터에는 비트코인의 표가 보인다. 오늘도 주식으로만 10억을, 비트코인으로만 50억을 벌었다. 더 벌고 싶다. 그때 한 통의 문자가 들어온다.
‘물방울과 바위의 길 인 더 마켓.’
래리는 문자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비서를 부른다.
"'물방울과 바위의 길'이 마켓에 나왔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비서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래리에게 보여준다. 래리의 의뢰인이 주기적으로 부탁했던 작가의 최고라고 일컫는 작품의 이미지가 지금 래리 비서의 휴대폰에서 보인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켓에 나와있다는 의미이다.
래리는 단 한 번도 의뢰인의 부탁을 실패한 적이 없다. 래리의 갤러리가 지금까지 메가 갤러리가 된 것은 들어온 의뢰를 반드시 실행시켰기 때문이다. 신뢰는 래리 갤러리의 존속력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는 의뢰인은 존에게 늘 주식정보와 코인을 포함한 다양한 루트로 돈을 벌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최고의 고객이기도 하다. 이 고객을 늘 만족시켜 주면 래리의 주머니는 늘 빵빵해진다.
작품을 팔 때 지만이는 언제나 을이다. 을이지만 작품을 팔 때는 갑처럼 보여야 한다. 구매자들이 작품을 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매자를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된다. 물건 하나만 팔고 끝날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매자가 우월하게끔 느끼게 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우월하게만 느끼게 하면 나를 무시한다. 그러니 지만이의 입장에서는 구매자를 은근 무시하다가 결국 구매자가 우월하다고 느끼게 해 준다. 지만이는 돈만 벌면 그뿐이다. 그게 갤러리 비즈니스다. 좋은 갤러리 비즈니스는 감정의 중립성과 협상의 기술, 즉 말재주가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가끔 자괴감이 생긴다. 특히 지금처럼 돈을 못 벌 때는. 돈이 되는 작품이 있으면 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만이는 돈이 되는 작품을 팔아본 적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 갤러리가 운영되는 게 신기할 뿐이다.
언제나 을의 처지이었던 지만이는 처음으로 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벌써 소문들은 뚜벅이들이 연락이 온다. 평상시 자기를 무시했던 사람도 친한 척 연락이 온다. 한번 갤러리로 오겠다고 한다. 역겹다. 겉으로는 미술이 좋네 마네 하면서 결국 돈이 목적인 사람들이다. 약속을 잡으려는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래리가 지만이의 갤러리로 들어온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래리의 회사가 고래라면 지만이의 갤러리는 플랑크톤이다. 지만이의 갤러리는 작지만 다양한 그림이 걸려있다. 돈이 되는 그림은 아니지만 알찬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이다. 래리의 회사에서 제작한 판화도 보인다. 래리가 당당히 들어와 악수를 청한다.
지만이는 갤러리 문을 닫는다. 그리고 래리에게 커피를 타준다. 수많은 비서와 딜러들을 거느리는 래리와는 달리 지만이는 혼자 갤러리를 운영한다. 지만이는 래리가 갤러리를 운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래리는 지만이 같은 갤러리스트가 아니다. 래리에게 있어서 갤러리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여러 회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래리 역시 큰 미술 컬렉터로 잘 알려졌다지만 역시나 지만이는 그를 미술 컬렉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뒤에서 산 그림은 모두 더 많은 가격을 받고 다 팔아버린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래리는 모든 걸 다 돈으로만 보는 성공한 현금부자일 뿐이다. 살기 위해 갤러리를 운영하는 자신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래와 플랑크톤이다. 마음만 먹으면 래리는 지만이의 갤러리를 사들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래리가 '물방울과 바위의 길' 작품을 들여다본다.
"좋네요. 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얼마를 원하시죠?"
"아, 얼마에 구매를 원하시나요?"
"먼저 얼마를 원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마켓을 고려해서 가격을 조금 더 처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생각하시는 가격이 있으실 거 아닙니까?"
지만이의 질문에 래리는 대답 대신 공간을 둘러본다. 작지만 알차다. 미술 세계는 광범위해 보여도 좁은 세계이다. 서로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수 있다. 래리가 미술시장에 들어온 지는 10년 정도 되었다. 그전에는 부모에게 받은 재산으로 미술작품을 샀었다. 모은 건 아니었다. 미술작품을 사서 더 높은 가격에 팔았다. 돈이 잘 들어왔다. 그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이용해 돈을 많이 벌었다. 래리는 미술이 좋았다. 팔리기 전에 자신의 벽에 걸어두고 잠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돈이 더 좋았다. 바로 미술작품이 안 팔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래리는 팔리는 그림만 샀기 때문에 사들인 작품을 팔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구매자들은 그림을 직접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전시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갤러리를 열었다. 갤러리를 열고 그림을 걸자 생각이 흔들리기도 했다. 판매를 위한 공간보다는 래리의 개인 공간으로 만들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구매자들이 와서 돈을 제시할 때면 과감하게 팔아버렸다. 돈 되는 작품은 사기도 힘들지만, 때를 놓치면 아무리 돈 되는 작품이라도 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비즈니스는 타이밍이다.
갤러리들이 자신에게 늘 다가와서 작품들을 구매하라고 보여주기도 한다. 래리는 가끔 마음에 드는 걸 고른다. 팔릴 작품들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만약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갤러리들을 통해 구매하지 않았다. 작가에게 연락하면 더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래리는 안다. 자신의 행동이 아트월드의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을. 하지만 돈 앞에서는 그런 상도덕 따위는 개돼지나 줘야 한다고 믿었다. 돈은 누구나 벌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돈을 번다면 누군가는 돈을 잃는다. 래리는 돈을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래리는 미술 컬렉터 모임에서 만난 현재 가장 큰 고객이 건네준 정보로 인해 부모님보다 더 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부모님께 이제는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 눈치를 보는 시절이 지나갔다. 이제는 자신의 부모님이 눈치를 보고 돈을 달라고 한다. 래리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당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한테 받은 설움이 이 최대 고객을 통해 말끔히 씻겨져 내려갔다. 이 최대 고객은 10년 동안 래리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 래리는 좋은 미술품을 구해다 주었다.
좋은 정보를 받기 위해 래리는 열심히 일했다. 노동이 아니다. 이 최대 고객은 래리와는 다르게 미술 모으는 걸 평생 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절대 되팔지 않고 나중에 미술관을 짓기 위해 미술품을 모은다고 했다. 래리가 미술품을 팔고 남는 돈도 상당했다. 래리는 노동과 일은 다르다고 믿는다. 노동은 억지로 살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일은 선택적으로 하는 것이다. 일은 즐길 수 있지만, 노동은 즐길 수 없다. 미술품을 팔고 남은 돈으로 주식을 사거나 다른 것을 사서 묵혀둔다. 때가 되면 가격이 오르고 팔아서 이익을 남겨 또 다른 미술품을 산다. 이 선순환이 지금의 래리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래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래리에게 있어서 미술품은 돈으로 인해 거칠어진 자신의 마음을 정화해 주는 동시에 돈을 벌게 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돈을 벌게 해주는 미술품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10년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일과는 달리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 이런 래리와는 달리 지만이는 갤러리 운영을 30년 이상 해왔다고 한다. 베테랑이다. 지만이와 계약을 맺고 함께 일하는 작가들도 있다. 래리는 작가들하고는 계약하며 일하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만이는 다르다. 돈이 되지 않아도 미술작품으로 갤러리를 계속해서 유지한다. 래리가 가끔 갤러리에 적자가 나면 다른 사업체로 메꾸기도 한다. 래리는 빠져나갈 구멍을 언제나 만들어놨다. 지만이는 갤러리 외에는 아무런 구멍이 없다. 오직 한길만 파는 인간이다.
그런 지만이에게 '물방울과 바위의 길' 작품이 들어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물방울과 바위의 길’ 작가는 특이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돈을 준다고 전시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그냥 자기 돈 내고 생전 처음 들어본 동네에 조그마한 공간에 전시를 하기도 한다. 그 동네가 잘되기를 바라서란다. 평화주의자이기에 전쟁이 일어나는 동네에도 전시한다. 너무 특이하다. 그런 사람이라면 래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자신에게 그림을 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지만이에게 준 것이 이해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결국 래리에게 오게 될 운명이다. 지만이를 통해 사면 돈이 조금 더 들뿐이지만 래리에게 있어서 크게 차이도 없다.
자신에게 이걸 구매할 수 있는 돈의 능력이 있는 것은 어쩌면 이 작품이 자신에게 들어올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래리가 일을 한다면 지만이는 노동에 가깝다. 살기 위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을 것이다. 래리의 돈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래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