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만 해야 살 수 있는 사회
집에 도착하자 왠 시커먼 놈이 내 딸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고 있다. 사태가 바로 파악이 되었다. 내 집에 몰래 침입해서 내 물건과 돈을 훔치려는 도둑에서 이제는 내 딸을 강간하려 하는 강도 놈이 되어 버젓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엄마의 본능으로 주위에 있는 물건을 집었다. 그리고 이 놈을 때려잡으려 물건을 집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멈칫한다. 이 빌어먹을 강도 놈을 때리면 안 된다. 경찰이 올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방어만 해야 한다.
이 세상은 방어만 해야 살 수 있는 사회이다.
빌어먹을...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구정이 코 앞인데...
구정 때 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둘이서 재밌게 놀려고 했다. 오랜만에 장터에서 많은 음식재료를 장 봐왔다. 그런데 지금 이 강도 놈 하나 때문에 우리의 구정이 망치게 생겼다. 아니, 망쳤다.
이전에 한번 우리 집에 침입한 도둑을 프라이팬으로 때렸다가 도둑이 나를 역고소하는 바람에 재판까지 간 적이 있다. 너무나 당당한 도둑이었다. 자기가 돈이 없으니 내 집을 침입했다면서 집주인인 내가 상해를 입혔단다. 그 무거운 프라이팬으로 자기를 내리치는 바람에 자기가 전치 26주를 받았단다.
뭔 개소-..-;
당연히 나는 무죄였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내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까웠다. 도둑이 나에게 피해보상을 해줘야 했지만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고 결국 나는 피해보상금도 못 받고 있다가 오늘 또 다른 강도가 침입한 것이다.
이전 도둑사건 때문에 억울하다고 했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정의보다는 질서가 우선이라고 한다. 이전에 생긴 법을 따르고 있기에 바꿔야 하는 걸 알아도 쉽지 않다고 한다. 높은 직위의 사람이 당하지 않는 이상 바뀌기 힘들 거라고 한다. 기자들이 나서서 기사를 써주고 나가서 시위라도 하라고 한다. 그러면 바뀔지도 모른다고... 오늘 하루도 빠듯하게 사는 내가 나가서 시위할 시간이 어디 있나? 모두가 다 사정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사정은? 내가 묻자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방어하는 기술을 배우라고 한다.
뭔 개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죄가 없다 하더라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통화부터 시작해서 경찰조사를 위해 경찰서를 계속 들락날락하게 하더니 결국 법원까지 가야 했던 그 과정이 너무나도 짜증이 났다. 내 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때려잡은 것뿐인데 그걸 고소한 도둑 새끼나, 그 도둑 새끼가 고소했다고 들어주는 사법부나. 아니, 내가 그럼 경찰이 올 때까지 방어하면서 기다리라는 건가?
그렇다.
경찰이 올 때까지 방어하면서 '적당히' 패주고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이 '적당히'도 관점의 차이이기 때문에 결국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다. 방어만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에서는 가만히 있는 게 최고라는 것이다.
뭔 개-..-
경찰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내 휴대폰에서 112를 눌러야 한다. 강도가 나를 공격하려는데 언제 누르란 말인가? 다행히 긴급통화 버튼을 쉽게 누를 수 있는 장치가 떠올랐다. 이것도 내가 '방어능력'이 생겨서 떠오른 기억이지 아니었으면 긴급통화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전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강도 놈은 왜 또 남의 집에 들어와서는... 저번 도둑놈과는 조금 다르다. 금품갈취만 몰래 하려다 내 딸을 발견했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내 딸의 행색을 봐서는 내 딸을 건드리려고 했던 것 같다. 나를 보자 놀라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까지 노리려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들어왔다가도 여자만 사는 집인 줄 알고 음흉한 생각을 한 듯했다. 내 딸이 좀 이쁘긴 하다. 몸매도 나 닮아서 좋다. 나도 꽤 중후한 미모가...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왜 이놈의 도둑이나 강도 놈들은 하나같이 내 집에 침입하는 건가. 왜 또 굳이 우리 집을. 우리 집이 근방에서 튀는 집도 아니고 그냥 조그만 아파트의 한 거주지일 뿐인데. 우리 두 모녀는 열심히 산다. 각자 맡은 일도 잘하고 꾸준히 운동도 하고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모녀다. 다 우리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었지 이 강도 놈보고 침이나 흘리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강도 놈이 흉기를 휘두른다. 거리가 조금 있어 그 흉기가 나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강도 놈이 나를 위협하면서 옷을 벗으라고 한다. 그러면 조용히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하고는 나가겠다고 한다. 너무 저급하게 말해서 내 머릿속에서 저 새끼의 언어를 순화시켰다. 지금 이 놈의 눈동자가 벌써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이상한 영상을 계속해서 본 눈동자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까? 어떻게 아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런 능력이 생긴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전 강도 사건 이후로 나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 방어 능력이다. 이전 도둑놈 사건이 (당연히) 나의 무죄로 끝나면서였다. 그날 저녁 기분이 더러워 혼자 한잔하러 가다가 뭔가에 부딪혔다. 무엇에 부딪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잠시 멍 때리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그 이후로 나를 공격하려는 모든 것에 방어가 가능한 능력이 생겼다.
그다음 날 강남대로에서 어깨빵을 하려는 미친놈을 만났는데 희한하게 그놈의 어깨빵을 다 피했다. 신기했다. 그놈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이전에 무엇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내 머릿속에 설계도처럼 그려졌다. 내가 그놈의 어깨빵을 피하자 계속해서 나를 쫓아다니며 어깨빵을 하려 했지만 모두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아, 지금 상황에서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강도 놈이 다시 흉기를 휘두른다. 이번 공격에는 가만히 있으면 그 흉기에 내 얼굴이 그어질 것이다. 내 이쁜 얼굴. 나는 피했다. 도둑놈이 약간 놀라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빠르게 흉기를 연속으로 휘두르기 시작한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휘두른다. 이런 공격은 뒤로 물러서면 된다. 다시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휘두른다. 흉기가 지나가는 방향으로 내가 움직이면 피해진다. 그 순간 내 눈에는 내 사랑스러운 딸이 들어온다.
어깨까지 내려온 딸의 헝클어진 옷과 머리. 다행히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내가 집에 와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 딸을 건드리려 했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으려고 했다.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생각도 하기 싫다. 이제 보니 강도가 아니라 이놈은 강간범이었다. 이 놈의 눈빛을 보니 이전에 이상한 영상을 실컷 보고는 깜깜한 밤 cctv 없는 한적한 골목길에서 여자를 강간한 적이 있는 모습이 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지금 당장에 이 강간범을 죽이고 싶지만 죽이면 내 손해다. 지금 이 강간범을 죽인다면 강간범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 되어 방송을 탈 것이고 나와 내 딸의 신상은 다 공개될 것이며 나는 한동안 강간범을 살해했다는 죄를 벗기 위해 돈 쓰고 시간 쓰며 힘겹게 살게 될 것이다. 머릿속으로 다 그려졌다. 저 놈이 훔쳐가려는 돈은 내 딸 시집갈 때 주려고 열심히 모은 건데. 이런 생각에 미치자 이 강간범이 어떤 무고한 여성을 강간해 임신시킨 적도 있다는 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이 또 흉기를 휘두른다. 이번에는 찌르기다. 이런 공격에서 정석으로 방어하는 방법은 살짝 옆으로 피해 이놈의 팔을 붙잡아 부러트리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또 복잡해진다. 난 경찰도 아니고 시민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공격할 수가 없다. 아, 시민이라서 공격할 수 없는 건가? 그럼 경찰이 없을 때 이런 상황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지키라고. 이전 경험이 나로 하여금 강간범으로부터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이 놈이 나를 찌르기로 공격하다가 내가 피하니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사이 나는 겨우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있었다. 집을 이사가던지 아니면 보안을 더 확실히 하던지 해야지.
강간범은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일어난다.
"제법이야. 그래. 이렇게 나와야 내가 더 꼴리지."
저급한 새끼. 이 강간범 새끼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만지작 거리며 나와 내 딸을 보면서 침을 흘린다. 그리고는 다시 흉기를 꽉 쥐더니 나에게 다가와 휘두르기 시작한다. 방어능력이 생기기 이전이었으면 벌써 흉기에 맞고 못된 짓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디로 흉기가 향하는지 잘 보인다. 나는 또 살짝 피한다. 벽시계를 쳐다본다. 경찰을 부른 지 5분이 지났으니 곧 도착할 것이다. 5분만 더 버티자. 강간범이 흉기를 다시 휘두른다. 흉기를 사용하는 것이 서툴지만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니었다. 이제 이 강간범은 방향성 없이 흉기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다. 뭐 하나 걸려라인가? 자기 딴에는 방향성 없이 휘두르지만 내 눈에는 정확한 방향이 보인다. 다른 팔로 나를 붙잡으려 하지만 나는 또 피한다. 계속 공격하다가 힘든지 잠시 멈추고는 씩씩댄다. 모녀 둘만 사니 만만하게 봤나 보다. 남편 없는 여자 집이니 쉬울 거라 생각했나 보다. 이 강간 놈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화만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이런 강간 놈에게 방어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이런 상황에 놓이게 만든 사회가 얄미웠다.
하지만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방어능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계속 이성적으로 있어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강간범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내 딸을 생각해야 한다. 이 사회의 법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설령 내가 무죄로 끝난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아무리 악인을 죽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건 내가 사는 사회의 법 체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극적이고 오지랖과 냄비 근성이 존재하고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군지 알 수 있는 이 사회에서는 튀지 말아야 한다.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도 조심해야 한다. 방어만 하면서 조용히 살아야 하는 사회이다.
계속 휘두르는 흉기에 피하기만 했다가는 집안 물건 다 부술 것 같다. 내가 아끼는 그릇을 깬다면 내 눈이 뒤집힐 것이다. '방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늘 이성적이어야 한다.'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아, 저 그릇. 남편 놈이 바람피우기 전에 사준 건데. 깨부수어도 되려나? 차라리 저 그릇으로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저 강간범의 대가리를 깨버릴까? 다시 여러 가지 상상에 사로잡힌다. 방어기술이 생긴 이후로 이상하게도 툭하면 상상하는 버릇이 함께 생겼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어서 그런가? 정신 차리자. 지금은 경찰이 올 때까지 저 강간범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계속 피하다가는 내 물건 다 부서질 것이다. 그리고 잘못하다가 내 딸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옆에 뜨거운 냄비를 집는 커다란 장갑이 보인다. 장갑을 집어 흉기를 막는다. 강간범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흉기를 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자기보다 힘이 더 세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다른 팔로 나를 잡으려고 뻗는다. 나는 피한다. 강간범의 눈빛이 변한다.
"뭐야 이 아줌마."
'아줌마?'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온다. 아, 내 딸과 함께 있는 걸 알지. 남편이 바람피우고 나간 뒤로 이상하게 아줌마라는 단어에 꽂혔다. 다시 제정신을 차린다.
강간범이 칼 손잡이에서 손을 빼고는 이번에는 두 손으로 나를 잡으려고 한다. 내가 장갑으로 또 방어한다. 내 뒤로는 고등학생인 딸이 어느새 프라이팬을 들고 서 있다. 역시 내 딸. 언제든지 프라이팬을 내리 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딸이 프라이팬을 내리치는 순간 또 복잡해질 것이다. 우린 조용히 살고 싶다. 복잡한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경찰이 도착했으면 한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아줌마도 원하잖아. 왜 이렇게 개겨?"
'뭘 원한다는 거야. 아무리 원해도 너는 아니야 새끼야.'
이상한 동영상을 잔뜩 보더니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놈이다. 정신병원에 보내던지 해야 하는데 이 사회가 그럴 리가 없다. 선한 사람에게 더 뜯어내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사람에게 더 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강간범은 어느새 내 기술을 파악한 듯하다. 갑자기 라이터를 꺼내더니 종이에 불을 붙인다.
"어디 이것도 막아봐 이년아."
미친놈이다. 왜 욕을 하고 그러는지. 불을 어떻게 방어하지? 불은 뜨겁고 나는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어 능력 중에 불을 끄는 기술은 없다. 아직은 말이다. 불이 나면 나만 타는 게 아니라 집도 타고 이 아파트도 다 타고. 그냥 이렇게 불을 내게 놔두는 게 더 나을까? 적어도 저 강간범이 방화범으로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설마 저랬는데도 내 죄라고 하진 않겠지? 또 다른 상상력이 떠오른다. 모르겠다. 강간범이 불을 못 내게 하려면 내가 어쩔 수 없이 제압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복잡해지겠지. 모르겠다. 이전 사건이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과거는 확실히 일어난 일이라 머릿속에서 떠오르면 알게 되지만 미래는 과거만큼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내가 사는 사회의 법이 워낙 말랑말랑해서 설령 내가 미래를 본다 하더라도 충분히 바뀔 수가 있다.
강간범이 불을 붙인 종이를 우리에게 던진다. 나는 내 딸을 붙잡고 불이 붙은 종이를 피했다. 불이 여기저기에 붙기 시작하면서 나와 내 딸이 마련했던 소중한 집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내 딸을 데리고 뒤쪽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이제야 들리는 경찰들의 사이렌소리와 함께 아파트 전체가 훨훨 타오른다. 경찰들이 나를 잡아간다. 내 딸도 잡아간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다. 우선 조사를 해야 한단다. 그놈의 조사.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뭔 놈의 조사나 회의를 그렇게 하는지.
또 복잡하게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오고 어디를 가고 해야겠지. 내 일터에서는 이제 나를 해고할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이런 일에 연루되면 내 잘못처럼 돼버린다. 강간범은 어디 갔지? 못 잡았단다.
이런 개-..-;
경찰이 나를 차에 태운다. 나는 경찰을 노려본다. 내 딸은 어디 있냐고 최대한 냉정하게 물었다. 감정을 싫으면 이성을 잃을까 봐였다. 저들이 아까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울 때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내 방어능력으로 저들에게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딸을 생각해서 나는 방어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갔다.
경찰이 뒤돌아 나를 쳐다본다.
"다 압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 능력 때문에 지금 저와 같이 가는 거니까요. 저와 있는 게 더 안전할 겁니다. 방화범... 아니, 그 강간범은 저번 도둑놈처럼 돈을 털려고 당신 집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일부러 지시를 받고 아주머니 집에 간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살려고 저런 짓을 한 거고요. 아주머니의 능력, 아니, 우리의 능력으로 지금 해결해야 할 게 있어요."
'다 안다고...? 그리고 뭐? 아주머니?' 아, 내 딸과 함께 있는 걸 알았지. 나는 다시 생각에 사로잡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왜 또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는지.
"우리의 능력?..."
내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걸 어떻게...?"
"상대방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가 보이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어떠한 공격에서도 방어가 가능한 것이지요. 계속 이상한 상상이나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어떠한 상황인지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벌어졌었는지, 모두 꿈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 머릿속에서 방어 예측이 가능한 것이지요. 꿈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잔상이 남아 데자뷔처럼 현실에서 나타나지요. 능력이 강해질수록 예측이 더 잘 맞기도 할 거고요."
"그런데 왜 제가 신고한 지 한참뒤에 온 거예요? 일찍 왔으면 집이 불이 타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요."
"경찰서에 가서 다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더 급한 문제가 있어요. 아마 당신이 지금 제말을 듣게 되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뭔데요."
"저희들의 능력은 저희들 의지대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타인에 의해, 환경에 의해 나타나지요. 문제는 저희들의 능력이 나타날 때마다 저희들의 목숨줄이 점점 더 짧아지는 거예요."
나는 경찰의 말에 당황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방어를 할 때마다 죽는다고? 경찰은 무표정으로 자신이 운전하던 차를 경찰서에 주차한다. 너무나도 오기 싫은 경찰서이다. 지난날의 나쁜 기억이 떠오른다.
"압니다. 오기 싫으시겠죠. 하지만 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내가 죽게 생겼는데 지금 이 딴 게 무슨 소용이에요?"
"저희처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많아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요. 문제는 그 능력의 사용 목적이지요. 저처럼 선한 쪽으로 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신처럼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쪽으로 그저 오늘을 잘 버티기 위해 쓰려는 중도의 사람이 있어요. 단도진입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처럼 중도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결국 악으로 갈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저희 같은 선한 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이 능력을 악한 쪽으로 사용하려는 저런 강간범 같은 사람들 때문이에요. 저희는 그런 사람들과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전쟁?'
경찰은 내가 전에도 간 적 있던 경찰서의 방으로 데려갔다. 조용하고, 나릇하고 의지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방. 그러면서 사람을 엄청 귀찮게 하는 그런 장소였다. 하지만 이 경찰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그 방의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저희 경찰서는 일종의 비밀 아지트예요.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정식 경찰은 아닙니다만 비밀리에 저희와 일하고 있지요.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줄어드는 목숨, 정의를 위해 사용하고 싶어 하니까요."
목숨을 걸고 일한다니... 정의가 어디 있냐 이 양반아. 지금 나 역시도 목숨을 걸으라는 말인가? 어차피 이제 내 목숨은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인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니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 일어나는 걸까? 난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설령 그래야 한다 하더라도 내 아까운 목숨을 존재하지 않는 정의에 걸기 싫다. 정의는 결국 내가 옳을 때만 나타나는데 말이다.
내 딸은 어떻게 해야 하란 말인가? 튀지 않고 조용히 돈 벌고 쓰면서 내 딸하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그게 나의 목적이다. 굳이 시위에 안 나가는 것도 그 이유다. 세상에 정의라는 건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두가 밥벌이로 사는 세상인데 도대체 왜...
"이런 능력을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 저 강간범 같은 놈들을 다 찾으면요? 처리할 거예요? 죽일 거냐고요. 저 놈들은 왜 저러는데요?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거 아닙니까!"
질문으로 시작해 결국 내가 따지듯 묻자 경찰이 지긋이 나를 쳐다보더니 옆에 동료를 한번 쳐다본다.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입을 연다.
"저희들의 방어능력이 있고 계속해서 선한 쪽으로 사용하면 그 능력이 더 강해집니다. 동시에 저희들의 목숨도 더 빨리 줄어들고요. 반면에 악한 쪽으로 사용하는 저들의 목숨은 더 늘어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들 예상이긴 하지만 저희들이 가진 목숨기간을 저들이 가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 말씀대로 악한 행위를 하면 할수록 저들의 생각도 점점 더 이상하게 되지요. 즉, 저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더 유지하기 위해서 강간이나 절도, 폭행 같은 악한 행위를 더 할 거라는 겁니다."
경찰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진다. 숙연이라 말하지만 분노가 들끓는데 이성적으로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악과 선, 선과 악. 그리고 중도. 내 눈앞에는 갈림길이 보인다. 목숨을 유지하냐, 아니면 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전쟁에 참여해 목숨줄이 짧아지냐. 이대로 중도로 있다가 결국 악으로 빠질 것인가? 나에게 원치 않은 이런 선택조차 너무 싫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내 딸이 이 비밀 아지트로 들어온다. 아... 난 단번에 알았다. 내 딸에게도 나와 같은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내 딸이 어떤 선택을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