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Identity)은 무엇인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아직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 자기 길을 일찍 찾던데 말이야."
물론 그 말에 담긴 마음은 잘 알고 있다. 그 말속에는, 세상에서 나만 멈춰 있는 듯한 조급함, 주변 사람들은 이미 자기 세계를 가진 것처럼 보일 때 드는 그 막막함이나 불안감이 숨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조용히 되묻고 싶어진다. 그 사람이 정말 ‘운이 좋아서’ 정체성을 찾은 걸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숱하게 길을 헤매고 나서야, 그 끝에 작은 불빛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걸까?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은 인간의 삶을 8단계 발달 과제로 설명했는데, 그중 5단계로 '정체성 대 역할 혼란(Identity vs Role confusion)'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즉,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가치를 따르는 존재인가를 스스로 정의해야만 혼란에서 벗어나 통합된 자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계는 우연히 지나치지 않는다. 반드시 ‘위기(Crisis)’와 ‘탐색(Exploration)’이라는 긴 여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를 확장한 마르샤(James E. Marcia)의 자아정체성 지위 모델은 말한다. 정체성은 ‘유예(Moratorium)’, ‘혼란(Diffusion)’, ‘폐쇄(Foreclosure)’, ‘성취(Achievement)’라는 네 단계가 있고, 그중에서도 '정체성 성취(Identity achievement)'는, 삶의 방향, 가치관, 직업 등을 깊이 고민하고, 탐색한 끝에 내린 선택이라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체성은 '운처럼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 시간을 들여 만들어가는 ‘심리적 구축물’이라는 것이다. 한 줄 또는 한 장으로 요약된 자기 이야기의 정체는, 사실 수많은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절과 수용을 버텨낸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문장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하룻밤 사이에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 물음은 삶 전체를 통과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조용하게 나를 나로 구성해 나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흔들렸던 나, 무너졌던 나, 그래도 다시 일어선 내가 함께 적혀 있다.
나는 믿고 있다. 정체성은 마치 지층처럼, 시간과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굳어진 마음의 단면이라고 말이다. 그건 우연히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나만의 곡괭이로 파내야 드러나는 나만의 무늬이다.
그러나 물론, 아직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다. 그건 단지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사의 절정은 언제나 마지막이 아닌 중간에 도달한다.
한 사람이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말은 얼마나 많은 고요한 싸움 끝에 도달한 결론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분명, 운으로 자신만의 목표, 가치, 인생관, 삶의 의미들을 찾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삶과 마음을 진지하게 살아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