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여백에 대하여
“질문 있으신 분?”
교실에 울리는 그 말에, 손을 든 누군가가 입을 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질문은 앞서 언급된 내용과 맞닿아 있지 않고, 이미 설명한 내용이거나, 혹은 너무 멀리 나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질문을 보고 속으로 생각한다. ‘공부를 안 했네’, ‘집중을 못했구나’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서 다른 신호를 보고는 한다. 그건 어쩌면, 내용이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붙일 수 있는 곳에 임시로 내용을 걸어둔 것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스키마(Schema)의 부재 또는 불일치’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스키마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의 틀이다. 누군가가 새로운 정보를 들었을 때, 그 정보를 어디에 붙여야 할지 적절한 ‘자리’가 없다면, 정보는 허공을 떠돌다 엉뚱한 지점에 내려앉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의도와는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은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또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이라는 작은 책상이 있다. 여기에 동시에 너무 많은 정보가 올라오면, 사람은 책상을 정리하지 못한 채 가장 익숙한 것만 움켜잡게 된다.
그래서 복잡한 내용을 설명한 뒤의 질문이 핵심을 피해 가거나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한 부주의가 아니라, 인지적 과부하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일 수 있다.
특히 성인 학습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스스로에 대한 생각과 사회적 평가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 새로운 분야 앞에서 ‘이해하지 못함’을 경험하는 순간, 그들의 질문은 정보보다는 자존감의 회복을 위한 언어가 된다.
질문은 이해를 위한 게 아니라 ‘나도 여기 있다’, ‘나는 이만큼 알고 있다’는 소속감과 정체성 회복의 장치가 된다.
우리는 질문을 ‘정확함’으로만 평가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인지적, 감정적 요소들이 얽혀 있다. 어쩌면 가장 어긋난 질문이 가장 용기 있는 질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어딘지 확실히 모르겠는 지점에서 무언가 묻는 것’ 자체는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시도다.
그리고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꼭 질문의 정확성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어떤 질문은 어설프고, 어떤 질문은 동문서답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나는 배우고 싶은 사람입니다'라는 의지를 보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어긋난 질문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나는, 누군가가 어설프게라도 손을 드는 순간, 그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 그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