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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Oct 31. 2019

모든 경계는 잠재적 전선이다.

갈등은 왜 끊이지 않는가? 

갈등은 다양하지만, 양상은 비슷하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몇 가지 이슈가 발생한다. 마침 그때 읽은 책들이 생각을 정리 시키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럴 때가. 최근 몇 개월이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을 구름처럼 돌아다니는 생각이 있다. 사실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냥 접어둘까 했는데,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 노트북 앞에 앉는다. 일단 쓰고 나면, 한 동안은 잠잠할 테니. 내 머릿속 질문은 이것이다. “갈등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개인의 탓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최근 뉴스, 사회나 정치 어디를 봐도 갈등을 자주 목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를 보자. 최근 몇 개월 간 '조국 대전'이라고 불리는, 사회적으로 격렬한 갈등이 있었다. 검찰과 언론 개혁, 교육 공정성, 계층화 등 지금까지 누적된 사회 문제들이 하나의 이슈로 촉발 되었고, 곳곳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분명한 것은 저마다의 상황과 관점에 따라 척결해야 할 ‘이익집단’이 각기 달라졌다는 점이다. 경제면을 봐도 그렇다. 최근에 본 기사는 모 자동차 회사의 일감이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 사실 관계와 진위 여부를 떠나서 내가 주목한 것은 댓글인데, 최근의 여론은 ‘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만약 노조원이 이 글을 봤다면 어땠을까? 말할 것도 없이,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은 사건의 현상이나 주장이 아니라 구조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갈등이다. 나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사회적 이슈들의 배경은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갈등이 벌어지는 구조와 양상만큼은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민을 할 때쯤 나에게 들어온 책이 여러 권이다. 정인보의 <초유기체적 인간>과 켄 윌버의 <무경계> 그리고 C.P.스노우의 <두 문화>와 윌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를 읽었고 이 책들에 기대어 내 생각을 얼기설기 엮어보기로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된다. (무경계 P. 29) 





모든 경계는 잠재적 전선이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갈등’이 아니라 ‘경계’다. 켄 윌버는 <무경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문이며 정말로 던져져야 할 질문은 “나는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고 말한다. 하나의 존재는 경계 지어짐과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의 경계는 자신의 몸이다. 아이에겐 모든 외부가 위협적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 순간 두 번째로 형성되는 경계가 바로 ‘가족’이다. 특히 엄마는 아이와 거의 하나가 되어 강력한 경계를 형성한다. 이는 부모들에게 ‘개인의 이기심’을 누그러뜨리게 하고,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서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모들이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고, 번민하고 또 성장한다. 나도 그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다양한 경계에 속하며 그에 따라 갖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내 경계가 ‘몸’일 때 나는 ‘강정욱’이지만, ‘가족’일 때 나는 ‘아빠’다. ‘회사'로 경계 지을 때 나는 한 명의 HR Manager이지만, ‘사내 동호회’에선 일개 ‘회원'이 된다. 만약 ‘스타트업’으로 경계 지으면 또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경계는 잠재적 전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내 동호회를 운영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우리 회사는 최소 5명이 되어야 하나의 동호회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멤버 등록의 기준이 되는 매월 말일마다 각 동호회들은 서로와 경쟁한다. (동호회가 워낙 많기에, 생각보다 회원 모집이 쉽지 않다.) 결국, 하나의 경계에겐 스스로의 존속이 첫 번째 목적이 되고 그것은 잠재적인 갈등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갈등 양상은 경계의 층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데, 가장 극대화되는 이슈가 출산이다. 사실, (누군가에겐 버럭 할 소리겠지만) 개인의 생사와 사회의 생사는 별개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사회와 개인은 서로 다른 ‘경계’를 갖기에 그에 따라 다른 이해관계를 보인다. 국가와 사회 관점에서 ‘출산율’은 핵심 지표다. 그래서 매년 엄청난 예산과 인적 자원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나 자신의 안녕이 유일한 목적인 개인 입장에서 출산은 선택 사항일 뿐이며, 요즘엔 그리 선호되는 옵션도 아니다. 전체 최적화와 부분 혹은 개인 최적화는 이리도 간격이 크다. 정연보의 <초유기체적 인간>은 이 아이러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정리하자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끊임없이 이해관계의 충돌과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인간이 갖는 숙명이다.  


초유기체적 사회가 초유기체적 아사회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민주적인 사회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것을 예고한다. 개별적으로 생존과 생식을 도모해야 하는 개인들이 모인 초유기체, 그런 초유기체들이 모여 이룬 더 큰 초유기체의 내부에서 모두의 이해가 일치하여 한마음이 되는 일은 예외적이며 오히려 끊임없는 이해의 충돌과 갈등이 빚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초유기체가 매일 열병을 앓으며 허약한 상태에 놓이기 쉽다는 뜻이다.(초유기체적 인간, 42쪽)



기능 조직과 목적 조직


앞서 ‘모든 경계는 잠재적 전선이다’라는 전제는 조직을 디자인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중요 요소다. 조직을 구성하는 방법은 크게 기능과 목적 조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목적 조직이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인력을 하나의 목적 (Ex. 신규 서비스 개발) 하에 두는 것이고, 기능 조직이란 동일한 직무로 부서를 편성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Ex. 개발팀은 상품을 만들고, 영업팀은 그것을 판다.) 대부분의 조직은 하나의 상품/서비스를 중심에 놓는, 기능 조직으로 시작된다. 우선 비슷한 직무가 함께하기 때문에 전문성을 기르기에 좋다. 각 부서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나씩 도맡는다.   


하지만, 급격한 성장과 함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어느 순간 ‘조직 전체’로서의 경계는 점차 흐려지고 '내가 속한 조직'과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개인’으로 시야가 좁혀진다. 그러한 구조는 부서 이기주의를 자연스럽게 잉태하고 경영자들은 최초의 목적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다. 그중 하나가 목적 조직의 도입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혼란스럽다. 기존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지’를 묻기 때문이다. 조직에 유입되는 정보도, 함께 일하는 팀원도, 달성해야 할 결과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해관계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매트릭스 조직 구조는 복잡하고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하긴 하지만, ‘경계 설정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이다. 정체성이 흔들어야, 역설적으로 전체가 보이기 때문이다.  


공식적 조직 구조만큼이나, 비공식적 관계가 다양하게 형성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속한 버즈빌의 경우 수많은 비공식적 관계망이 존재한다. 점심 식사, 버디, 스터디, 동호회, 전체 회식, Random 자리 배치 등. 서로 다른 구성원들끼리, 주기적이고 우연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환경과 문화가 조성되어 있다. 본인 부서의 사정밖에 모를 때와, 다른 부서의 고충과 어려움을 알 때의 반응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우연적 만남에 의해서 자연스레 이끌어진다. 점심 먹는 문화만 봐도 그렇다. 보통 많은 회사들이 같은 부서원들과 반복해서 밥을 먹는다. 편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고착화된다는 단점도 있다. 관계가 제한될 때, 관점과 이해도 묶인다. 그 결과 부서 간 갈등은 고조된다.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망의 확장은 이러한 관점의 고착화를 방지하고 예방한다.   


“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 특히 그 대표적 인물로 물리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는 몰이해, 때로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의 두 문화, 곧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이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C.P.스노우 / 두 문화)





경계를 넓히기, 만남을 만들기. 


정리하자면, 결국 내가 속한 경계는 관점을 제한하며, 그것이 지나치면 고착화된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노조 혹은 이기적인 경영진 모두 이에 해당될 수 있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듯, 하나의 입장에 고립될 때 상대편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최근 남혐/여혐 현상도 그에 해당될 수 있고 종교 간 갈등, 세대 간 갈등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내가 속한 경계를 인지하는 것이다. 하나의 조직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하나의 정체성에 몰입되면 될수록, 그것은 우리의 관점을 잠식한다.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경계 내부는 우군이고 외부는 적군이 된다.  스스로가 그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두 번째는 내가 속한 경계를 벗어나 보는 것이다. 물고기는 평생 동안 딱 한번, 죽는 순간에 물을 인지한다. 이처럼 경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켄 윌버가 말했듯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무경계 P.43) 상투스런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 내가 원망스럽지만, 결국은 ‘대화와 마주침’이 필요하다. 다양한 경계들을 넘나들고 마주해야 한다. 다른 이들의 신발을 기꺼이 신어 보고자 할 때 관점을 체득할 수 있고, 나아가 포용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딱 하나, 정치적 관점을 제외하고. 나와 아버진 정치적 관점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일 년에 두 번은 반드시 대화한다. 서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화를 그치고 싶진 않다. 서로가 서로를 꼭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나에게 더 두려운 것은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서로를 혐오의 대상을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갈등이고, 단절이고, 전쟁이다.  


윌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식 수준을 높이는 것은 독서나 여행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또는 회화나 조각 작품을 보거나 영화나 연극을 감상하는 등과 같은 대안적인 행위와 자유롭게 접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지, 교훈적인 영화나 연극 또는 책을 꾸준하게 섭취하면서 한 가지 관점을 권위적으로 주입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결국 경계가 존재하는 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갈등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싸우고, 뒤섞이고, 웃고 우는 과정이 반복될 때 경계는 흐려지고, 정반합의 지혜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한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은 지상에 사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다. 시어도어 젤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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