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라는 건 없다
1.
20대 중반까지도, 나는 나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나 자신을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했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그런 줄 믿고 있었다. 부모님도 나도.
물론 지금도 내 자아의 일부는 그러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변화의 조짐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에 시작되었다.
2007년 11월 2일. 인생 처음으로 외국으로 떠났고 (놀랍게도 첫 비행이었다.)
필리핀과 호주로 한 동안 나가 있으면서 나의 성격도 조금씩 달라졌다.
분위기나 상황도 자유로웠고,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 준 '조건'도 있다.
하지만, 절반 정도는 내가 의도적으로 노력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의 '모드mode'를 바꾸고자 애썼다.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약간은 더 과도하게 행동했고, 모르는 것에도 도전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파티에선 필리핀 전통 춤을 배워서 추기도 했다. ;;
그래서인지, 필리핀에서의 나를 본 사람들은 꽤 사교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은 그것이 내 나름의 연습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2.
2010년 초반에, 어느 스터디를 통해 처음으로 강의를 했다.
누군가 앞에 서서 말한다는 것이 익숙치 않았고, 부끄러웠고, 이상했지만,
희안하게 그리 낯설진 않았다. 발표를 마치고 앉았을 때 건강한 흥분이 느껴졌다.
아직도 손바닥에 흐르는 땀과 온몸에 흘렀던 그 전류를 잊지 못한다.
표현은 어렵지만, 내 안의 또다른 내가 조금 드러난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자주 강의를 했다. 처음의 흥분과 떨림은 점차 사라졌지만
사람들 앞에 설 기회는 더 많아졌고, 결국 그것이 내 삶을 바꿨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 성격도 달라졌던 것 같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어느 순간 편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론, 나라는 인간이 말이 참 많구나 하는 것도 느꼈다. (하필이면 내 아들도 말이 많다.)
나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은 나를 '외향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맞는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3.
그렇게 내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헌데, 어느 순간 허전했다. 뭘 안다고 주절주절 거리는 내 모습이 지겨웠다.
그것이 2015년 말이다. 심마니스쿨이란 1인 기업으로 활동한지 3년차.
(나름의) 강의를 시작하고 내향에서 외향으로 삶이 달라진지 6년차.
그때 우연히 입사 제안이 들어왔고 문득, 나를 좀 더 확장시켜 보고 싶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프리랜서는 무척이나 자유로웠지만, 그러한 '자유'에 갇히는 것이 나에겐 부자유스러웠다.
'자유로울 때'도 '자유롭지 않을 때'도 매이지 않는 것이 진짜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벌써 1년 반이 지났고,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새삼스럽게 매일 만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여전히 말은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강사로 활동할 때 보다는 아니지만.
4.
나는 존재론이 아니라 관계론을 믿는다.
자아라는 것은 고정되지 않았다고. 놓여진 관계에 의해 생성된다고 믿는다.
최근에 이진경 작가의 <불교를 철학한다>를 읽고 있는데 비슷한 대목이 나오더라.
원래의 자아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으며 , 실존주의자들의 말처럼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을 뜻할 뿐이다. p.82
나는 이 단어가 참 와닿았다. '잠정적인 안정성'
자아와 자아를 둘러싼 폭 넓은 가능성을 표현하기에 이 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
자아는 분명 고정되어어야 하지만, 머물러선 안 된다. 그것은 잠정적이어야 한다.
'자아'를 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형성된 뉴런들의 패턴들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 반면 자아의 경계가 유연하고 새로운 상황에 열려 있다면, 뇌와 다른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에너지 소모는 많겠지만, 그렇게 사용된 에너지는 새로운 능력으로 남을 것이다. P.84-85
어쩌면 삶은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고,
하나의 자아를 만들고, 다시 무너뜨리는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그러니, 진정한 나 혹은 진짜 나를 찾아서 떠날 필요는 없다. 그건 허상이다.
그저 지금의 나를 만끽하고, 새로운 상황에 나를 노출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적절할 때 나오도록 돕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