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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Jan 03. 2018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두려웠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를 읽으며 느낀 내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 토니의 인생과 그를 둘러싼 사건이 어찌 나에게 두려움으로 와 닿는 것일까. 느낌 기저에 깔린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내면을 파 해쳐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것.


지하철을 타다 보면, 어깨를 밀치고 자리를 차지하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또 유모차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쌩하고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분들도 본다.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여유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것. 나는 그것이 두렵다.


소설 속 화자인 토니도 흔한 남자답게 꽤나 둔감하다. 눈치가 나만큼이나 없다. 스스로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진짜 문제다. 그런 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좀처럼 이해를 못 하네? 하긴 언제 한 번이라도 그랬던 적이 있었나?


소중한 사람과의 대화 중에도,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도, 토니는 자신의 생각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대화는 가벼워지고, 깊은 관계는 사라진다. 그 결과 몸의 감각은 무뎌진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알 길이 없다. (물론, 그 무딘 감각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기도 하지만)


이는 비단, 토니만 겪는 일이 아니다. 직장 생활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보편적 경험이다. 어느 실험에서 봤는데, 권력을 쥔 사람은 남녀 구분 없이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한다고 한다. 권력이 높고 시간이 없을수록, 충동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2.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는 것.


"역사란 무엇일까?"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은 대답한다. '승자들의 거짓말', '패배자들의 자기기만', 콜린의 '생 양파 샌드위치'까지. 그중, 에이드리언 핀의 정의는 특이하다.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무언가 일어났다는 사실'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이 짧은 문장에, 이 소설의 핵심이 담겨있다. 우리는 결국 장님과 귀머거리이다. 그렇게 더듬더듬 역사를 찾아나갈 수밖에 없다. 그 또한 어느 역사가가 해석해 놓은 역사에 기대어서 말이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과 역사도 그럴진대, 하물며 개인의 역사는 어떠할까?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될 기억들, 소중한 의미들과 수많은 각오들. 이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가? 소설 속 토니는 '부정확한' 자신의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혼란에 빠진다. 충격적인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모든 기억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철저히 소실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나 보편적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1987년 6월 항쟁을, 2014년 세월호 사건을 제 눈으로 보고도 영원히 잊어버린 것처럼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기억해야 한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책임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말했듯, 무지는 죄다. 우린 이 '기억의 소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나의 역사는 철저히 나의 책임이다. 기억하고 싶은,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을 추리고 그 뜻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결국, 역사란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서 부단히 쓰이고, 재해석되어야 하니까.



3. 삶의 현실에 안주하고, 불가항력에 복속하는 것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토니의 독백이다. 어찌나 공감되던지.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나는 종종 느낀다. 자기 성찰과 자기기만은 비례한다는 것을. 자신을 진정성 있게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미세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회피한다는 것도 안다. 어쩌면 자신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나 또한 그렇다.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고 맹새하고, 각오를 다지는 것도 여러 번이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주저하고, 변명하고, 자기합리화로 스스로를 속인 적도 여러 번이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 박은 타조처럼.


그래서, 가끔은 새해가 오는 것이 두렵다. 해 놓은 것 없이 나이를 먹는 것이 무섭다. 더군다나 1년이란 시간 후에도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릴까 봐 무섭다. 즉, 토니처럼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두려움의 본질이다.  





두려움을 넘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간단하다. 위의 두려움을 뒤바꿔보자. 더 깊이 관계 맺고, 많이 기록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기. 토니처럼 살게 될까 봐 두렵다면, 그가 진정 후회한 것을 지금 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마지막을 후회로 남기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살아있는다고 다 살아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젊은 시절의 자아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무신경하고 순진했었다. 누구든 안 그렇겠는가마는, 이런 성정들을 과장해선 안 된다. 그래 봤자 현재의 삶을 자화자찬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다.


그래서, 다짐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재검토하기로. 비록, 반쪽짜리의 왜곡되고 부정확한 역사이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복원해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며 말이다. 그리고 허락된다면 향후 10년 주기로 꾸준히 내 삶의 흔적을 새기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정리하자. 나는 패배자가 되어, 자기기만하고 싶지도 않고. 승리자가 되어, 거짓말을 늘어놓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살아남은 자가 되어서, 자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인생이라고 평하고 싶다. 그게 연말에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한 생각이자, 두려움을 떨쳐보려는 새해의 각오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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