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오늘 다룰 책은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란 긴 제목의 책이다. 꽤 예전에 읽은 책이고, 저자는 권용선 작가. 아주 유명한 책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도 당시에 읽었을 때의 흥분과 감동이 남아있다. 적어도 나에겐 대단히 훌륭한 책인데, 벤야민이란 사람을 만나게 해준 점에서 가장 감사하다.
참고로 벤야민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해서, 그를 이해했다고 결코 오해해선 안 된다. 그의 1차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그의 사상을 심도 깊게 생각해 본 경험도 일천하다. 그럼에도 벤야민이 나에게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어렴픗한 인상' 덕분이다. 그가 바라본 세상,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동경하고, 그저 좋다. 이유 없이 좋다는 것은 글쓰기 위한 좋은 이유가 된다.
이 책을 대략 5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발터 벤야민’은 이동하는 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벤야민이 위대한 것은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이 아니다. 그의 존재 방식,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마드’로서 존재했던 균형 감각, 거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떄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 닮고 싶은 것도 거기에 있다. 나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싶다. 방향성은 있지만, 예상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으면 한다. 그것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인, ‘노마드’라고 부른다.
"그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그가 그 무엇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들에 대한 빛나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되지 않았던 그의 선택, 혹은 탁월한 위치 감각에 있다. 그는 어느 하나의 장소 혹은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지식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고 시선의 위치를 바꾸며 글쓰기의 패턴을 교정하면서 매번 다른 것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류 불가능한 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P. 20
"앞서 말했듯이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했던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고 그곳에 안주하는 정착민의 특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성격은 오히려 척박한 불모의 땅을 찾아다니며 쓸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유목민의 것에 가깝다. 유목민은 벤야민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괴적 성격’을 지닌 자이다." P. 26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했던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2. 벤야민의 비평이란, ‘그들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의 비평은 일반적인 개념과 다르다. 그는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보는 것’을 비평이라 여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라고 하는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한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서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의 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는 ‘노마드’의 것. 그 독특한 정체성이 비평의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그의 어떤 경험이 그러한 철학을 낳게 했을까. 더욱 궁금해진다.
"벤야민이 되고자 했던 ‘비평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격의 비평가들처럼 작품을 해설하고 평가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 벤야민은 비평적 대상으로 삼았던 예술가 혹은 연구자들을 통해 무엇인가 그들 안에 있는 고유한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때로는 개념의 형태로, 또 때로는 방법적 틀로 전유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새로운 글쓰기를 발명했고, 자기 당대에는 없는 새로운 직업을 창안하고자 했던 것이다. ... 그는 대중적인 동의나 학문적 권위를 획득하는 일에 일관되게 무심했고, 비평가라는 제도적 칭호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오히려 ‘비평’이라는 개념을 그 자신이 철처히 실천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 그의 비평 작업은 자신 안에 있던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보들레드를 발견하는 것,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작가들, 작품들, 언어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한다. ... 때문에 그에게 있어 1인칭의 표상 형식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36-39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중요한 것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
과거에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기’. 벤야민은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해낸다. "문학적 몽타주. 말로 할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 줄 뿐. 가치 있는 것만 발취하거나 재기발랄한 표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같은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 누더기와 쓰레기를 목록별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으로 그것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해줄 생각이다. 즉 그것들을 재인용하는 것이다.” 파편들을 새롭게 연결함으로써, 매번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마셜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곧 메시지'란 사실을 벤야민은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했다.
"벤야민은 개념적인 언어로 사물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이미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념적 층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것을 위해 ‘인용부호 없는 인용술’이 동원된다. 벤야민은 그것을 ‘문학적 몽타주’라고 불렀다.
벤야민의 문학적 몽타주는 언어로 만들어진 문장들이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공간에 재배열 되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때 각각의 파편들은 자기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장소에서 이웃한 것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전혀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각각의 파편들이 하나의 별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그들 사이에 관계의 선분이 그어질 때마다 매번 하나의 별자리가 만들어지도록 문장들을 배열하는 것, 이것이 벤야민이 시도했던 문학적 몽타주 혹은 문학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조성법이다.” P.83
말로 할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 줄 뿐.
4.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변화’는 언제 시작될까? ‘지금 이 모습’을 참을 수 없을 때 시작된다. 다시 말해, ‘불만’을 가지지 않는 자는 변화할 수도 없다.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재앙이다. 고민할 것도, 더 나아질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안전한 삶. 그것이야 말로 가장 불안한 삶이 아닐까. 벤야민은 이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세계라 부른다.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니체의 언어로 표현하면 ‘말세인의 삶!’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떤 것인가. 불편과 부당, 폭력이 만연하는 세계? 혹은 차별과 빈곤과 착취로 얼룩진 세계? 물론 이런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가리는 세련된 판타스마고리아의 세계에서 배짱 좋게 잠자는 일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권태와 무위’ 속에서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계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조장한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사유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조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는 상태를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그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출구는 그때 만들어진다.” P.167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그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출구는 그때 만들어진다.
5. 노동자는 어떻게 ‘소비자’로서 훈련받는가?
자본주의은 노동자와 결과물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소비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모두 ‘생산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소비하고,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는 자는 결코 ‘집단의 잠'에서 깨어날 수 없다. 앞서 말했던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이들은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없다. 그들은 멈춰있는 자들이며, 고정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벤야민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자기화하는 ‘허의의식’을 갖는 것,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 자기 노동이 노동자 자신을 소외시키는 현실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자기소외는 필연적이다. 부르주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허의의식을 심어 줌으로써 노동을 자본의 도구로 만들고, 노동의 결과물인 상품으로부터 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소비자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착취를 전면화한다. ... 부르주아 계급의 심리적 토대는 그의 전 시간을 자본가로서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감독하고 생산물을 판매하는 데 바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이 고도화되었을 때 만들어진다. 곧, 부르주아의 계급적 정체성은 그가 지닌 재화(화폐)를 소비할 때가 아니라, 자본가로서 잉여적인 것을 생산하고 축적할 때 만들어진다는 점을 그는 맑스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벤야민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생산하는 자로서 ‘노동자’가 어떻게 ‘소비자’로서 훈련받게 되는지이며,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는 것이다."
이해가 짧아서, 글에 두서도 없다.
어쨌든 앞서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가 지향하는 바를 3가지 정도만 정리하고자 한다.
1. 멈춰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것
-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도, 지금 상태에 머무는 것도 모두 여기에 해당이 된다. 이를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가 누구인지,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집요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움직이려면 지금의 내가 멈춰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에. 변화는 지금 이 모습을 참을 수 없을 때 일어나기에.
2. 말하기 보단, 보여주는 것.
-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개념어는 사어다’라고. 개념으로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도 예전엔 그것을 몰았지만, 지금은 절감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관찰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인지 잘 알기에.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다시 태어나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차근차근 노력하는 수 밖에.
3. 소비하기 보단, 생산하는 것.
- 근대는 사회가 ‘생산자’를 '소비자’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대부분은 그것에 쉽게 길들여졌지만, 몇몇 지식인들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건해졌다. 이제 사람은 너무나 쉽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일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직장인들은 주말이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주중엔 온라인 쇼핑을 하며 ‘소비’를 통해 ‘자신’을 만들었다.
벤야민은 이를 두려워한 사람이다. 나 역시 이것이 두렵다. ‘내 이름을 거는 것'은 그래서 무섭지만, 중요하다. 살이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불만족한 상태를,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자기만의 균형 감각을, 결국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을 위해 벤야민은 싸웠다. 나도 그렇게 싸우고 싶다.
(전반적으로 제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링크는 여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