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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백설기 Jan 27. 2023

내 인생의 첫 스타

나를 살리는 추억에세이 쓰기. #5

설 연휴 TV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룹 송골매다.     


KBS ‘송골매, 40년만의 비행’ 콘서트에서 배철수와 구창모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배철수는 DJ로 MC로 만나왔지만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선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업을 한다는 구창모도 간간이 노래를 불러왔지만 콘서트에서 제대로 부르기는 40년 세월이 흘렀다.     


구창모는 유리같이 맑고 쨍한 목소리로 여전히 목울대를 조였다 풀었다 노래해 저사람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인가 궁금하게 만들었다. 찾아보니 한국나이로 칠십.


전성기 때는 목으로만 노래하는 것 같아 깊이감이 없어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금이 부드럽고 순해 듣기 좋았다.       


구창모보다 한 살이 많은 배철수는 그답게 툭툭 내뱉듯 담백하고 정직하게 노래해서 고마웠다. 그 무심함 속에 여유와 무게가 스며들어 예상치 못한 감동으로 다가왔는데 후반 무렵 ‘빗물’에 이르러선 하마터면 울 뻔했다.  


흐트러진 백발의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두고 “돌아선 그대 등에 흐르는”을 터뜨렸을 때 칠순을 넘기고도 청춘에 복무하는 노병의 고단함이 짠하게 흘렀다.    

  

30년 넘게 DJ를 하며 한 번도 지각과 결근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우리가 잊고 있던 긴 세월 동안 혼자 청춘이라는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선택한 운명이면서 그 운명에 복종해야 하는 아이러니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것에 더 강한 종속을 당하며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송골매, 40년만의 비행' (TV화면 촬영)

콘서트가 끝날 무렵 누가 더 대단했나 생각하다가 정작 놀라운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걸 느꼈다. 두 시간 동안 모든 노래를 따박따박 따라부르던 사람, 바로 나였다.     

 

송골매의 노래 중엔 고어가 많아 들리는 대로 대충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나라 우리님’의 “곰뷔님뷔 님뷔곰뷔”와 “산득산득하더라”는 보통 “곰비님비” “산듯산듯하더라”로 불려지고, ‘세상만사’의  “이러구러”를 “이력으로”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걸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박자에 딱딱 맞춰 신나게 불러댔는데,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나의 유난스런 기억력뿐이 아니었다.       


때마침 가수 장기하가 나오더니 송골매가 자신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그룹이라며 대선배들에게 헌사를 바쳤다.


그래, 나도 헌사를 바칠 차례가 된 것인가. 송골매가 펄펄 날던 그 때로 돌아가 본다.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후 오빠와 나에겐 고대하던 자신만의 방이 생겼다. 중학생이 된 나에겐 가장 큰 선물이었다. 두 개의 방은 아빠가 열흘도 걸리지 않아 직접 만들었다.


 아궁이 하나에 방 두 개를 이어 붙였는데도 한겨울에 큰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벽돌에 스티로폼을 덧대 단열을 한 일종의 가건물이었다. 오후가 되면 벽돌 틈 사이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스티로폼을 통과하며 벽에 연초록 바둑판을 만들었다.


그 따스한 격자가 단열을 뛰어넘었다.      


내 방 창문은 윗집 옥자언니네를 올려다보고 있어서 밥 때가 되면 울려 퍼지는 아줌마의 우렁찬 “옥자야~”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아줌마의 “옥자야~”는 수탉이 새벽 첫 홰를 칠 때 뽑아내는 울음소리보다 더 크고 강렬해 우리 동네를 대표하는 소리라 할 수 있었다. 판소리로 치면 남성적인 동편제였다. 그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는 건 당연히 행운이었다.

     

창문 밖 고드름이 녹아 또록또록 물방울 소리를 내던 첫 겨울이 지나고 나는 중2, 오빠는 고1이 되었다. 방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오빠와 나의 본격적인 청소년기가 시작된 느낌이었다.  

    

오빠에게 통기타가 생긴 것도 그 즈음으로 기억된다. 당시 통기타를 다룰 줄 아는 남학생은 면을 다 합쳐도 많지 않았다. 어느 동네 누구 식으로 한정되어 입소문을 탔는데 드디어 우리 오빠도 그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연한 베이지색 바디를 가진 세고비아 기타였다. 바이올린을 독학하시던 아빠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일까. 넓적한 통기타교본을 얼마동안 보는가 하더니 금세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덩달아 혼성듀엣이라도 된 양 노래를 불렀다. 부엌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떨어져있던 우리들의 방은 어느새 포크의전당이 돼가고 있었다.     


맨 처음 오빠가 연주했던 노래는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C-Am-Dm-G7 코드를 반복하는 통기타 포크송의 시조새같은 노래다. 라디오에서 듣는 것과 기타를 치며 부르는 맛이 전혀 달라 금방 빠져들었다.      


오빠와 앉아 3절까지 꼬박 불렀는데 마지막 부분의 “정말 정말 너를 사랑했었다고”에서 느껴지는 처연함이 좋아 혼자서 읊조리듯 불러보기도 했다.      


이어서 ‘꽃반지끼고’ ‘밤배’ ‘긴머리소녀’ ‘장미’ 같은 포크송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어니언스의 ‘편지’나 조동진의 ‘나뭇잎사이로’, 산울림의 ‘청춘’, 노고리지 ‘찻잔’도 불렀다.   


오빠와 나는 포크송을 섭렵하다시피 불러댔는데 오빠가 ‘뜯는다’고 표현했던 아르페지오 주법의 완성도 덕분이었다. 오빠는 반주를 시작하면 중간에 끊거나 다시 맞춰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땐 당연한 걸로 여겼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고교생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경지였다.      


아르페지오 주법의 백미는 영화 ‘금지된 장난’의 ‘로망스’였다. 온돌에 온기가 흐르기 시작하던 가을밤, 오빠가 머리를 가만히 숙인 채 ‘로망스’를 연주할 때의 선연한 감동을 잊지 못한다.  

    

오빠가 없을 때 앞부분을 겨우 흉내 내 보았지만 사람의 재능 중에 음악만은 신이 내려야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는 기타를 잡지 않았다.      


오빠가 아르페지오를 마스터하고 스트로크 주법을 시작하며 우리가 접어든 세계는 대학가요를 위시한 그룹사운드였다. ‘나어떡해’ ‘그대로그렇게’ ‘젊은미소’ ‘내가’ ‘꿈의대화’. 제목만 들어도 가슴 뛰는 노래들이다.  

    

특히 라이너스 ‘연’을 시작할 때면 오빠의 기타는 더 청아하게 스크로크의 진수를 연주했다.  나는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언덕위에 모여서” 직후에 나오는 ‘따단딴다단’ 간주에서 꼭 소리를 지르곤 했다.


후렴구에선 오빠와 번갈아 “하늘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한 점이 되어라”를 목청껏 외쳤다.   

   

송골매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는 그때부터도 세상을 달관한 듯 차원 높게 들렸다.      


오빠는 마침내 카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 부르자” 하면 카포를 끼우고 음계를 조절했는데 나는 모르는 세계였다.


기타줄도 자주 사러 갔다. 나도 가끔 기타줄을 사왔는데 돌돌 말려서 정사각형으로 나오는 모양이 세련돼서 좋았다.        


듀엣 노래 중에는 배따라기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를 자주 불렀다. 오빠가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를 띄우면 “나는요~. 비가 오며어언~~”하고 받았다.


박영민의 ‘창 밖에 잠수교가 보인다’의 ”이상하다 그치“ 부분을 청순한 척 부르는데 엄마가 뭐하는 거냐고 문을 열기도 했다.     


오빠가 혼자 부르는 노래 중의 백미는 김정호였다. ‘하얀 나비’ ‘날이 갈수록’은 김정호보다 잘 불렀다. ‘날이 갈수록’에는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내가 다니던 부여여고의 운동장을 감싼 넓은 잔디를 떠올리곤 했다.


하굣길 잿빛 잔디를 바라보며 가요에도 비장미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오빠는 원래 노래를 잘했다. 고교 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성악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던 오빠는 밝고 높은 음성의 테너였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음악 시간에 배웠다며 ‘평화의 도구’를 불렀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맑고 높게 이어지는 음성이 낯설어 오빠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오빠를 통해 팝송을 배운 건 지극히 당연했다. 오빠는 그 맑은 음성으로 ‘Perhaps Love’를,  ‘Annie's Song’을 불러주었다. 지금도 플라시도 도밍고를 보면 오빠가 부르던 ‘Perhaps Love’ 도입부가 떠오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노래도 기름지게(?) 잘 불렀다.   

   

‘모나코’ ‘시인과나’ ‘나자리노’ '고독한 양치기' '야생화' 같은 외국 연주곡도 오빠와 들었다. 그때는 딱히 명칭이 없어 경음악이라 불렸다. 오빠와 난 ‘여름비’와 ‘첫발자욱’을 특히 좋아했다.     


‘백야’ ‘아마데우스’ 등 흥행 영화와는 다른 의미의 웰메이드 영화를 처음 접한 것도 오빠를 통해서였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압도적인 독무와 모차르트의 특이한 웃음소리를 보며 내 인생에 드디어 영화가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근대(近代)라 말할 수 있는 중고생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식과 생각이 움트고 개성이 생겨나던 내 인생의 근대에서 압도적으로 아니 단독으로 영향을 준 이는 바로 한 사람, 두 살 위의 오빠다.


시도 아닌 군, 군 중에도 면, 면 중에도 리, 리 중에도 1구가 아닌 2구에서 오빠와 난 자랐다.


면소재지 전파사에 가면 쌍쌍트로트메들리 테이프 사이로 몇 개의 팝송 테이프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읍에 나가면 음악사에서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팔았다.      


우린 아궁이와 석유곤로,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옥자언니네 아랫집에서 자랐지만 음악 속에서 세계를 유영하며 푸른 꿈을 꾸었다.       


오빠를 생각하면 사이클과 스파이크, 샌드백, 그리고 기타가 떠오른다. 오빠는 완결된 고독의 세계에 일찌감치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사는 미남 성주였다.      


송골매도 훨씬 이전 내 인생의 첫 스타는 오빠였다.       


배철수는 콘서트 전 인터뷰에서 “이번 콘서트를 끝으로 완전히 음악을 접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


대중 앞에서 노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음악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빠가 나와 노래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빠의 노래가 끝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배철수는 팬들에 의해 앞으로도 오래 청춘에 복무할 것이다.


오빠도 생애 처음 다른 세계로 안내받은, 그래서 그 힘으로 지금도 꿈을 꾸는 한 사람의 열혈 팬에 의해 행복한 복무를 계속할 것이다.      


화이팅. 나의  스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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