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러 갈래?

by 심횬



스무 살의 12월은 축제다. 한 해가 지나감이 아쉽지 않고 다음 해가 되면 어른이 될 것 같은 기대감에 12월이 반짝인다. 두둑이 쌓인 다이어리 속 글들을 꺼내어 보며 괜한 든든함과 뿌듯함에 한 글자 한 글자 알뜰하게 읽어 내려가다 11월 19일에 시선이 멈췄다.


“영화 보러 갈래?”


일 년을 기다려 그 아이가 용기 낸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

“…..”


그 아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열아홉부터 시작된 마음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얼마나 커져 있는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스무 살의 나에게 사랑은 가습기의 수증기와 같다.

마음을 촉촉하게 해 주지만 잡히지가 않는다.

어떤 모양을 만들려 손으로 잡아도 흩어지고 만다.

마침 가습기에서 물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울린다.


“딩동딩동딩동“,

‘언제 가는 고갈되어 멈춰버릴지 모르는 것도 사랑’


나는 그 불편한 것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그 아이의 집념은 대단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른다. 메일함에 그 아이의 글이 쌓여가고 있다. 밤의 감성이 묻어 있는 글들이 풍성하게 담겨 내 마음에 들어앉는다. 물론 나는 답장을 해주었다. 하루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은 메일이 200통이 다 되어간다. 메일함으로 저장해 둔 글들이 참 좋아 읽고 또 읽는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한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


일 년째 대답 없는 물음표를 연신 던지는 그 아이는 박연우다. 우리는 6년 동안 다른 반이었던 초등학교 동창이다. 열아홉, 조용한 스터디카페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다


“혹시.. 윤설아?“

“응? “

“너 성동초등학교지?”

“아.. 어.”

“나 박연우야”

“혹시 옆반 박연우? “

“맞아, 반가워 “

“어.. 나도”


6년 만에 만난 연우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키가 컸고, 목소리도 컸다. 나는 작게 소곤소곤 이야기했는데 연우는 그곳이 스터디카페란 것을 잊은 것처럼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자주 마주쳤다. 집으로 가려고 일어나 걸음을 떼면 어느 순간 그 아이가 옆에 나란히 걸었다. 그것은 전혀 어색하거나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걸음에 고개를 살짝 돌려 보면 싱긋이 웃었다. 늘 그랬다. 분명 다른 시작점이었는데, 하루의 끝에는 그 아이가 옆에 있었다.


“언제든 다리 아프거나 힘들면 전화해. 데리러 갈게”

“연우야, 고마워 “


하지만 스무 살의 체력과 다리는 튼튼했다. 우리 집과 연우의 집은 백 걸음 거리에 있어 늘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늘 내 옆에 있었다. 그것은 서로 각자의 집으로 가는 길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연우는 언제나 한걸음 정도 떨어져 걸으며 내 걸음의 보폭을 맞추었다. 어쩌다 옆을 보면 씩 웃는 모습이었다. 이상하게 그 아이가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적당한 선을 지키며 내 일상에 들어와 있는 그 아이가 그냥 자연스러웠다.


11월 19일,


영화를 보러 가자는 연우의 이야기에 미안하다는 거절을 한 이후 연우는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이제 곧 한달이 되어 간다. 일년의 스며듬이 큰 산이 되었나보다.


그 산이 사라지고 나니 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공허함이 내 안에 꽉 찼다.

올 겨울들어 가장 추운날, 나는 공허함의 이유를 찾기 위해 그 아이의 집 앞으로 갔다.

하필 외투가 두껍지 않았다. 얇은 외투의 섬유 조직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이 칼 같이 느껴졌지만 연우를 만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왜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십분, 이십분, 삼심분...,


겨울의 칼 바람을 맞고 있으니 십분이 한시간처럼 느껴지고 손과 발이 꽁꽁 얼어 오기로 버텼다.

그러다 갑자기 태풍처럼 불어온 바람을 맞고 생각했다. '왜 나는 이렇게 추운 날, 얇은 옷을 입고 연우집 앞에 서 있는거지?' 그리곤 머리 끝이 쭈뼛하며 알게 된다. '나는 그 아이가 보고싶다.'


누군가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뛰어온다. 그리고 바람이 잠잠해졌다.


"왜 여기, 이렇게 춥게"..."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나란 것을 몰랐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와 나를 발견하고 연우는 뛰어 왔다. 그리고 외투를 벗어 그것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들어가자"


나는 아무 말이 없이 연우의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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