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외투의 느슨한 섬유 틈으로 들어온 겨울의 칼바람 때문에 내 몸속 깊은 곳까지 꽁꽁 얼어버린 느낌이었다. 그곳에 서서 연우를 기다려야 했다. 만나야 했다.
기다리며 공허함의 이유를 스스로 알게 되었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에 누군가가 뛰어 왔다.
연우였다. 차가운 바람은 두꺼운 외투도 뚫고 들어올 만큼 강력했는데 연우는 그 외투를 벗어 나를 감싸고 홑겹의 옷차림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 낮기온 영하 9도, 들어가자는 연우의 말에 망설일 틈이 없었다. 연우의 집에 들어서자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닿아 몸이 찌릿찌릿 간질간질했다. 꽁꽁 언 발이 풀리며 통증까지 느껴졌다.
몸의 구석구석이 녹는 감각이 불쾌했다. 연우의 집은 목재로 내부 마감을 해 마음에 닿는 느낌까지 따뜻했다.
“잠시만”
연우는 따뜻한 차를 커다란 컵에 가지고 왔다. 그것을 나에게 전하고 곧장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두꺼운 담요를 세 개씩이나 가지고 오는 모습에 웃음을 겨우 참았다. 담요를 잘 펴서 나에게 건네고 연우가 물었다.
“설아, 왜 우리 집 앞에…? “
연우는 나를 부를 때 “설아”라고 한다. 엄마나 친구들은 나를 “설아야”라고 부르는데, 연우는 메일의 첫 줄에 언제나 “설아“, 만나서는 나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기에 연우가 나를 부르는 내 이름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어색함을 뚫고 나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궁금했어, 내 공허함이”
“공허함? “
“응, 정확히 11월 19일, 영화 보자는 이야기에 난 거절의사를 보였고, 그날 이후 매일 옆에 있던 네가 없었어, 그리고 또 메일이 안 오잖아… 그런데 내 마음이 뭔지 몰라 더 공허해졌어”
나는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그대로 말하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공허함은 어떤 감정이야?”
“응? 음… 어떤 감정인지를 모르는 감정이야 음… 머릿속은 하얗고 일 손이 잡히지가 않았어, 괜히 다이어리를 꺼내서 예전 글들을 보고 또 봤어
“야, 박연우? 그런데 왜 그동안 내 옆에 있었어? 다이어리를 보는데 연우 너 이름이 절반 이더라”
“네가 좋아서…. 좋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옆에 있었지, 그런데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어.”
연우에게 처음으로 내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연우는 너무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 스며들어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1년 동안 계속된 연우의 배려를 알고 있었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그 아이의 마음도 어쩌면 알고 있었다.
아직 첫사랑도 못 해 본 나에게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멀고 이상해서 연우의 애씀을 그것이라 명명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은 한 번도 되지 못했지만 우리는 같은 학원을 다녔다. 어쩌면 박연우는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화이트데이날, 꽃 바구니 모양의 초록색 사탕 바구니,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연우가 가져온 사탕 바구니는 학원 안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그 바구니의 주인공이 나 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학원 수업이 끝나 학원 문 밖을 나와 걷는데 갑자기 연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수군거림에 왠지 나도 갖고 싶었던 그 초록색 사탕 바구니를 내미는 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이유 없이 탐이 났던 그 사탕 바구니를 가지고 집으로 뛰었다. 이상한 건 사탕 바구니를 건넨 뒤에 연우는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뭐 지금 생각해 보면 수줍음이 많았던 초등학교 남학생이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연우의 마음은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연우야 그런데 왜 그날 이후로 없어진 거야?, 내가 공허했던 이유는 너 때문이었고 오늘 너희 집 앞에 서 있었던 이유는…“
“잘 모르겠어 “
추위 속에서 떨며 알게 된 사실을… 연우가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널 불편하게 할 것만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설아, 김치볶음밥 먹을래? “
갑자기 김치볶음밥이라니… 나는 연우에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아 얼마나 이상했는지, 그 이상함이 마음을 얼마나 공허하게 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더 불편하게 했는지를…
정성스레 만든 김치볶음밥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이제 없어지지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