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횬 Apr 03. 2024

고백

고백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농염한 물감의 색은 자유의지다.

물의 닿음이란 필요조건이 있지만, 그 안에서는 어디로 향할지를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좋았다. 물감은 내편이라 답을 찾아줄 것만 같았다. 답을 찾기 위해 궁리하듯 멈추었다 움직이며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갔다.


삶에 대한 의지가 흐리멍덩해질 때 붓을 찾았다. 마치 신경안정제 약통을 급히 찾듯 붓을 찾고 물을 머금어 물감에 적셨다. 농염한 물감의 색은 특유의 에너지를 뿜으며 종이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답이 아니었지만, 속은 후련했다.


나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괜히 값이 비싼 아르쉬지를 한 장 크게 꺼내어 곧장 붓을 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붓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답을 찾는 걸까? 붓의 움직임 안에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아 종이에 닿은 물감의 번짐으로 답을 찾으려는 걸까?


백일이 넘게 혼자 있었지만 외롭다는 감정은 나에게 머물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싫어 다시 잠을 재우고 또 억지로 눈을 감고 있으면 어김없이 두통이 시작된다. 그것에도 요령이 생겨 이제 두통이 생기기 전에 눈을 뜨고 온몸의 세포를 깨운다.


두통이란 것이 왜 생길까 생각해 보니, 마음 세포가 이미 한참 전에 깨어났는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몸 세포가 원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원망이 시작되기 전에 몸을 달래준다.


피부의 촉각이 전해 주는 이불의 위로를 어떤 모양을 만들었다가 다시 풀어헤쳐 마음 안에 불어넣는다.

마음의 공기를 심장의 중앙까지 불어넣고 나면 하루가 시작된다.


물을 한잔 벌컥벌컥 마시고 시계를 본다.

“흠.. 하”

하루가 지겹지 않은 이유는 하루를 최대한 늦게 시작하는 것, 그렇게 백날이 지나고 있다.


이제 조금은 지겨워진 걸까? 누군가와의 대화가 그리운 걸까? 붓에 질문을 쏟아내다 답을 찾은 걸까?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휴대폰을 한참 찾으러 다녔다.


‘충전기는 어디 뒀더라?’


십분 넘게 서랍을 뒤져 선이 아무렇게나 꼬여 있는 휴대폰 충전기를 발견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일동안 이것이 없어 어쩌면 편안했다. 누군가에게 불쑥 연락을 받을 일도, 수시로 울리는 카톡에 피곤할 일도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통도 백일 정도는 가뿐하게 결핍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작은 결핍을 한 조각 발견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휴대폰을 만지락 거렸다. 세상이 너무나도 궁금한 순간도 찾아왔다. 그때마다 휴대폰 충전기를 찾다가 머리를 세게 좌우로 흔들며 찾는 행동을 멈추기도 했다.


아무도 찾지 못한 백일의 숨바꼭질에서 나는 꼭꼭 숨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도 꽁꽁 숨겼다.

백일의 기적은 갓난아이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백일이 지나자 누군가와의 대화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세상의 이야기가 간절하게 궁금해졌다.


“여보세요?”

“오랜만이야”

“잠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십 년 전 첫사랑에게 전화를 했다.


가까운 내편 이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숨기려 꽁꽁 숨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의도로  세명의 사람에게만 들켰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라기에 너무 많은 수인가?


그날도 그랬다. 그 아이는 아마도 아무도 알지 못할거라 생각했겠지만, 몇 일 뒤 나에게 사탕 바구니를 건넨 일을 모든 아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치 존 에버렛 밀레이스의 [The Woodman’s Daughter] 작품처럼 말이다. 그는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에서도 감정의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하고 있다. 그림 속 빨간옷을 입은 소년의 담담해보이는 표정이지만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다.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몸을 나무에 기대어 팔을 몸 뒤로 숨긴 자세는 수줍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나를 뒤 따라와 사탕 바구니를 건네던 순수한 그 아이의 표정과 몸짓이 그랬다.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마구 뛰는 가슴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고, 손을 내민 나의 표정이 그림 속 소녀와 닮아 있었다. 성인이 되어 [The Woodman’s Daughter] 작품을 만나 한참 소녀와 소년을 들여다보았다. 내 옆에 있었던 내 첫사랑과 함께.


밀레이스는 자연의 세밀한 묘사와 색채 사용으로 유명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세밀함이 강조되어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에서도 감정의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함께 있었던 배경이 될 장면을 떠올렸다. 우리의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면 어떨까? 한참동안 이야기 했다.


이제 그 장면도 기억을 한참 뒤적거려야 찾을 수 있고, 상상을 함께 넣어 완성이 될만큼 시간이 지나고 지금 우린 함께 있지 않다. 그런 그에게 전화를 했다.   


John Everett Millais. The Woodman's Daughter (1851)Oil on canvas. The Guildhall Art Gallery, UK   


작가의 이전글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