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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Aug 13. 2021

위로

상담사, 의사, 법의학자, 딸

자녀상 같은 일에는 남의 위로말은 아무 영향력이 없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본인이 겪은 만큼만 아는 법이고, 그나마도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이고, 장성한 자녀를 잃은 사람이면 모를까, 당신이 슬픔의 제스춰를 취해줄지언정 내 심정을 심연을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아는 고통만치만 공감하는 거라고. 선을 그었다면 그런 것이나, 정말 남의 말이 하나도 내게 닿지를 않았다. 나를 걱정해주느라 말을 고르는 그 예의와 정성은 고맙다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자살할 위인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24시간 나 자신을 단죄하는 나를 어쩔 줄을 몰라서 심리상담사를 찾아갔다. 12월까지 네 번을 만났다. 상담의 목적은 애도의 과정을 잘 통과하여 일상에 잘 안착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죄책감이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육십분 꽉 채워 많은 말을 했고, 치욕스럽게도, 마치고 나올 때 해소감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것이 상담의 선기능이고 위로였겠지. 그러나 상담한 날 하루는 마치 파헤쳐진 밭과 같은 마음으로 종일 울적했다.

프로페셔널 리스너 덕에 이 말 저 말 주워섬긴 것이겠지만, 이렇다할 상담사 코멘트는 기억나지 않는다. 심리검사도 하고 유년시절 분석도 있었는데. 다만 첫 상담시, 산후도우미를 너무 믿거니 하고 아기를 방치한 거 같다고, 죽기 전 날 저녁을 분단위로 얘기하고 나자, "업무하실 때도 그러신 편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아서 자책을 더해줬던 것. 그것만 기억이 있다.


올해는 정신과를 찾았다. 약을 처방받을 필요를 느껴서 처음 진료예약을 잡았다. 잠들기 어렵기도 했지만 꿈은 꿈대로 무서웠고, '살아있는게 치욕스럽다' 그런 문장이  마음을 장악해서, 그러한  자신이 놀랍고 걱정스러우면서도 등신같다 느끼던 나날이었다. 정상 출근하고 째애를 차로 등하원 시키고 저녁을 지어먹이고  되면 장을 보고 핸드폰 게임도 매일 하면서,  벌써 월요일이네  벌써 금요일이네 하고 겉보기로는 별일 없이 살았다. 처방받을 약을 진짜 먹을 것이냐는 사실 둘째 문제였고, 나는 정신과 의사에게 연민을 갈구하며 물어보고 싶었다. 산후도우미의 약봉지 내역을 들이밀며,  정신신경용제와 뇌기능개선제들의 성분과 용량이, 선생님 보시기에 밤에 두세시간 텀으로 일어나야 하는 입주 산후도우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먹어도  법한 것인지.  약들의 총합은 어떤 질환을 의미하는 것인지. 당신의 직업윤리는 잠시 눈감고 내게 힌트를 달라고 나의 죄책감에 근거를 달라고 빌고 싶었다.

나는 세번째 진료 때 부탁을 꺼냈다. 좀 봐주실 수 없나요?

그러자 의사는 역시나 볼 수도 말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말을 잇기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안타깝지만, 네가 외출한건 어느 산모나 할법한 가벼운 일이고, 그만 함몰되는 게 좋겠다. 산후도우미나, 남편이나, 너는 탓할만한 사람을 찾는가본데, 것두 방어기제다. 그만하고, 지금 이러느라 놓치고 있는 거, 나중에 또 후회할만한 일을 안만드는 것이 어떨까? 라는 요지로, 어지간해서는 조언이나 제안같은 걸 하지 않는 자리로 알고 있는데, 나한테 그만 방향 전환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 안갔다. 조언에 배알이 뒤틀려 그랬던 건 아니고, 예약날에 어린이집이 코로나 밀접접촉자 발생하여 폐쇄되는 일이 두어번 연달아 일어나고 그러고서도 이럭저럭 개판으로 꾸역꾸역은 살아졌기 때문에 안갔다. 너무 타당한 조언에 민망한 감정은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약봉지 내역을 해석해달라는게 내 가장 큰 필요였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당하고 나자 볼일이 없어졌다, 사실 그거같다.


상담사나 의사나 그래도 나를 알아줘서 울컥했던 부분은 있다. 내가 너무 피로할 거 같단 공감이었다. 정말 그러했다. 우울을 넘어서는 피로함. 그냥 흙이 되고 싶었다.


일방적으로 위로가 되었던 건, 좀 웃기지만, <유퀴즈>에 출연한 국과수 직원들과 법의학자들이었다.

정돈된 방송 멘트라 인지하면서도, 말해지지 않은 죽음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들의 업에 대한 진지한 마음, 뛰어난 검증 기술, 방대한 데이터 같은 것의 묘사를 보는 게 위로가 되었다. 아이 부검서의 '사인불상' 이란 결론이, 그냥 허투루 나온게 아니라 직업의식이 투철한 전문가들이 모여 자원을 투입해 모든 가능성을 염두하고 해부하고 조사한, 길고 긴 과정 끝에 나온 과학적 결론이였다고, 텔레비전에 나와 떠드는 그들이 바로 그 반증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또 한편은, 시체가 일상이니만치, 잠시 살다가는 인생 하루하루 그저 최선을 다하여, 그 판에 박힌 말이 그 사람들 입을 통해 들으니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겨우 티비를 보다가, 나도 죽음을, 비극이나 탈출옵션으로 과하게 의미부여하지 않고 그저 나에게도 일어날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 그때까지만 피로하자. 중간중간 웃는 날도 생기겠지.


친정엄마는 남은 자식에게 집착하게 될 거라 했지만, 다섯살 딸 아이는, 그저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러나 부담스럽고 버거운 존재이다. 딸은, 추석 당일날 식구들이 집에서 나가고 나와 단둘이 화장실에 남게 되자 며칠 전 질문을 재차 물어봤다.


"그런데, 하온이, 벌써 죽었지?"


눈치빠른 어린 영혼에게 두번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나는 그렇다고 수긍했다.

그 이후 교회 십자가를 지나갈 때마다, 저기 하온이가 앉아있다고 외치는 아이 말이 싫으면서도, 정말 딸애 눈애는 보이는겐가 믿고 싶은 마음.

겨울였나. 퇴근하여 아이를 급히 씻기고 뭘 해먹이나, 으레 피곤하고 꺼져버리고 싶던 평일 저녁에, 아이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엄마, 아직도 아파?"


"아~니. 엄마가 어디 다쳤나?"


나는 마음이 아직도 아프냐고 묻는 건줄 알고 놀라서 서둘러 일어나려고 했다.


"엄마 성기. 성기에서 하온이 나왔잖아. 이제 안아파?"


그래 그 아기가 엄마 속에서 밖으로 나왔었지. 출산 전에 관련 동화를 읽으며 나눴던 대화를 기억했던지.

엄마에게 뭐라도 말붙이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 몸조리 같은 거 나 자신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만4살 아이가 묻는 안부. 질 찢은 것도 소용이 없어졌단 허탈함.


"안 아파. 다 나아찌. (씨익)"


이런 위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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