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처한 굴레
이것은 여전히 작년에 죽은 자식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다음 자식.
둘째 아기의 임신과 임신 과정, 출산까지 너무나 무난했기 때문에 응급실 심폐소생실 앞에서, 이럴려고 그렇게 쉬웠던 것인가, 아이러니에 허탈해 했었다. 2019년 늦가을, 내 생에 자식을 하나 더 가져야 하나 생각이 슬그머니 생겼을 즈음, 아기는 이미 수정체로 태속에 존재해 있었고, 모두 정상 범위 내 건강한 태아였고, 예정일 2일 전 일요일 아침, 이슬이 비쳐, 나는 태평하게 공들여 샤워를 하고 국밥을 한사발 먹고, 잠든 첫째에게 입맞춤을 하고, 여보, 엄마 오시면 병원으로 와 바이, 하고서 택시를 호출해 홀로 여유롭게 분만실로 가, 분만실 입실한지 2시간 안에 출산을 했다. 축하를 받으며 득의만만했었지.
- 그러니 다섯 살, 열 살, 스무살 자식 잃은 부모는 얼마나 아깝겠냐. 첫째가 갔다고 생각해봐. 못살아.
위로랍시고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더 극심한 불행과의 비교는, 별수없이, 위안이 된다.
아기가 죽고 3주가 채 안되어 생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임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아가 빠져나간지 얼마 안 된 이 빈 자궁을 속히 채워야겠다고 의지로 생각했다. 그것이 슬픔이나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는 있는 것은 아니나, '잃은 재산을 만회해야겠다', 또한, '어차피 다 뒤져버릴 인간사, 슬픔에 주저앉느니 새 자식 뒤치닥거리에 정신팔려 십수년이 지나갔음 좋겠다', 에 가까웠다.
남편은 나의 의지를 뜨악해했다. 마음으로 와닿는 바가 없는 듯 했다. 우리는 둘 키울 카파가 안된다고 했다.그러나 때때로 뜬금없이 발기하며 말그대로 아파했다. 우리는 몸을 섞었다. '우리는 유전자의 숙주일 뿐이야' 자조하며. 우리의 유전자가 후손이 사라졌다며 온힘으로 보내오는 SOS 신호에 우리 부부는 속절없이 순종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날 아기의 출생 예정일은 9월 16일이다. 둘째 사망일이 추석 직전이라 남은 생의 추석들이 흙빛이 될터이었는데, 새로운 아기의 생일이 그것을 덮게 생겼다. 이것이 살아남은 나의 방식이다.
죽은 자식을 새 자식으로 채워넣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류 존속의 방식. 뇌의 고통을 임신 출산 육아의 수고로 덮어버리려는 것, 이것이 나의 본능.
복중의 새 아기로 우리 가족의 불행감이 떨쳐지고 기쁨이 내려앉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애도의 과정이(라고 믿음) 더디고 고통스럽게 우리 부부 일상을 관통해갔다. 불면과 우울, 분노가 뒤섞여 우리는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거나, 아프다 우는 상대한테 차마, 너보다 내 지경이 더 위중하니 그만 닥치라고 할 순 없으니 서로가 아플 때 눈길을 돌리고 모른 척 했다.
출산한지 4개월만에 다시 임신했다. 세상에 난지 40일이 안되어 아기는 다시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전 출산일과 다가올 출산예정일은 30일 차이가 난다. 셋째가 예정일대로 태어나면 태어난지 9일차가 둘째의 사망일이 된다.
이렇듯 임신 기간 내내 나의 물리적인 시간은 첫째를 먹이고 상대하는 데 쓰이고, 몸은 새 아기를 품는데 쓰이면서도 뇌와 감정은 죽은 둘째가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수많은 if들과, 왜 죽었을까라는 물음, 그리고 늘러붙은 우울감. 정신과 의사가 이제 좀 덮어두고 지금 놓치고 있는 것들을 챙기라고 말한 것은 그러니까 사실은 복중의 새 생명이었다.
철저한 계획임신을 해놓고도, 나는 태아에게 애정을 주지 못했다. 임신을 확인했을 땐, 안도감에 가까웠다.
이미 입은 부상은 가지고 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이 아이가 나를 부상에 무감각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게 회복아닐까. 그러나 불안과 우울은 기대를 압도했다.
마음이 온전치도 않은데 날 위해 임신을 하다니 애는 무슨 죄.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둘째를 가졌다는 옛여자들 얘기는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지고 경멸스러웠는데 나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살기를 허덕허덕하는 남편에게 새로운 자식이 새로운 삶의 명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
한편으로는, 죽은 아이도 죽기 불과 서너시간 전까지 아무런 위험 신호가 없었는데, 셋째라고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애 뿐만이 아니다. 나도 남편도 당장 내일의 안녕도 보장이 안되는데. 아직도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의 가지수가 너무나 많았고 나는 다 견디고 감내해내는 강한 사람이고 싶지는 않았다.이런 격한 불안이 나를 사로잡기도 했다.
일련의 산부인과 정기검진 결과를 대부분 귀담아듣지 않았다. 둘째도 태아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모든 게 정상이라고 했으니깐. 그러다 정밀초음파에서 아기가 내반족이란 소견을 받았다. 내반족이라함은 발이 안쪽으로 휘는 병이다. 첫째도 내반족이었던지라 관련 정보는 차고 넘치게 검색해본 바 있다.
정확한 치료 방법은 아기가 태어나서 실제 발을 봐야 정할 수 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너무나 곧고 예뻤던 둘째 아기의 발을 떠올렸다. 걔는 발도 정상이었는데.
나의 뇌와 호르몬이 과거와 부정적인 감정으로 꽉 차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멈출 수 없으면서도, 복중 태아의 기형이나 뇌 이상을 염려했다. 그런 불안은 꿈으로도 나왔고, 길에서도 부쩍 기형아나 자폐 스펙트럼 아이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내 팔자의 다음 고난은 그것이 아닐까, 당연하지. 이렇게 단정지으면서.
그런 와중에 받은 내반족 소견인데, 타격이 컸다. 갓난애 발에 깁스를 하게 될지, 아킬래스건 수술을 하게될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기를 안고 대학병원 대기실에서 서성이는 일, 묶인 아기 발의 진물과 냄새와 습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의 안타까움과 미안함, 모든 게 너무 피로했다. 너무나 피로하게 느껴져서 영원히 꺼져버리고 싶었다.
모든 걸 과거로 덮고 남은 생을 산뜻하게 살 순 없었나. 하나 있는 자식에게 리소스를 쏟아부으면서. 내 업에서도 보람과 인정을 찾고. 순간 순간 기분에 충실하면서. 어차피 완치란 없는 부상인데, 구태여 새 인격체를 만들어서 살아야하는 의무를 그 애에게도 지우고, 그 애를 키우는 일에 내 수고를 들이는게, 내 유한한 인생에 무슨 득이 되나?
뒤늦게 이런 한탄을 하는 게 너무나 머저리같고 불행을 자처하는 자 같으나 심정은 정말 그러했다. 등신같은 유전자의 숙주.
어쩌랴. 아기 발은 교정하면 된다. 오래 못걷고 쉽게 지치는 발이라 할지라도 목숨과 관련된 질병은 아니다. 교정하는 데까지 교정해야지. 자식이 굴레같다 할지라도, 나는 할말이 없어야 한다. 내가 살고자 내 욕심으로 만들어낸 내 자식.
예상출산일까지 보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