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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Dec 22. 2021

이 세상에 공짜는 읎다!

"'부나하벤'이라는 싱글 몰트위스키예요.”

제주공항 면세점에 가면 항상 스피릿 판매대 앞으로 발걸음이 저절로 옮겨진다. 그렇고 그런 위스키만 쭈욱 진열된 중에 눈에 익은 녀석 몇이 보여서 반갑게 다가간다. 오랜만에 손님이 관심을 보인 탓인지 짙은 감색 유니폼이 썩 잘 어울리는 여직원은 반색하며 나를 맞이한다. 어디 다른데 눈길만 돌리더라도 서운해할 것처럼 그녀는 즉시 위스키 병을 집어 들고 설명을 이어 나간다.     

"'다라 커(Darach Ur)'는 새 오크통이란 뜻이에요.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쓰는 언어입니다."

익숙지 않은 단어가 시야에 들어와 유심히 라벨을 쳐다보니 친절하게도 어원까지 알려준다.

'New Oak' 혹은 'Fresh Oak'라고 표기하면 될 일을 굳이 읽기조차 쉽지 않은 게일어로 적었다. 보다 더 신비스럽게 보여주기 위한 또 하나의 상술이리라. 요즘은 술을 판매하며 아울러 이야깃거리도 끼워 넣는 시대이다. 한국에서도 주류를 제조 판매하는 사람들이 한참 본받아야 할 점이다.     



여직원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일레이 섬사람들은 생굴에 위스키를 뿌려 먹어요."     

석화에 피티한 라프로익 위스키를 뿌리면 제격이다.

나도 때 마침 20여 년 전의 여행 기억을 떠올렸던 참이었다. 눈앞의 위스키 부나하벤을 생산하는 증류소가 자리한 스코틀랜드 아일라 Islay 섬이 생각났다. 게일어식 발음으로 섬 이름은 '아일라'가 맞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위스키의 성지’에서 아일레이로 표기했지만 현지의 안내 책자에도 관광객들에게 'eye-la'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자그마한 항구 마을 포트엘런의 한 식당에서 껍질 속에 갇힌 싱싱한 굴에 몰트위스키를 더블로 주문하여 흩뿌려 끼얹어 먹던 추억을 되새겼다. 해초의 향이 밴 체 알알이 살아있는 생굴과 갯내음이 스며든 피트향 위스키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었다. 자욱하게 밀려든 밤 안갯속,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외로움, 알싸한 슬픔이 가슴속에 잔잔히 밀려오는 그러한 멋과 함께...     



"부나하벤 증류소만 유일하게 위스키 숙성 시 버번위스키 통을 씁니다. 다른 데는 다 세리통을 사용하지요."

어라? 아가씨, 그건 좀. 설사 그렇더라도 오히려 내세울 일은 아닌데...

하지만 이 또한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옛날 같으면 남이 틀린 것을 바로잡아 주려고 어쩌고 저쩌고 잘난척하며 장황설을 늘어놓았을 게다. 이제는 '아일라면 어떻고 아일레이라고 부르면 어때', '버번통인들 어쩌리 세리통인들 저쩌리'이다.     



"아니. 여기 쥬라가 다 있네!"     

나는 눈을 의심하면서도 입으로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진열장 한 귀퉁이에 쥬라 위스키가 특이한 병 모양을 한채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지금 런던 히드로공항이 아닐까 하며 주위도 둘러보았다.  

우려할게 따로 있지. 서있던 곳은 틀림없이 천장이 나직한 제주 공항 면세점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아일라섬, 동북쪽에 쥬라 섬이 있다.



쥬라 Jura는 아일라 섬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위치한 인구 150명의 아주 작은 섬이다. 아일라와 불과 오백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척 간이기는 하여도 바다에 가로막힌 별개의 섬이므로 방문하려면 페리를 타고 건너야 한다. 글라스고우에서 조그마한 프로펠러 비행기로 일단 아일라로 갔다가 다시 배에 올라야 하는 외진 곳이다. 당시 아일라섬에는 증류소가 7개 있었으나 쥬라섬에는 쥬라가 유일하다. 거기에다 펍 하나, 식료품점 하나가 섬주민의 생활 본거지이다. 이 섬에는 아일라와 달리 관광객도 거의 없다. 소설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이 머물며 창작 활동을 했다는 정도가 몇 안 되는 자랑거리이다.     



"쥬라 증류소는... 어쩌고 저쩌고..."

직원은 본사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나열했겠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섬으로 들어가는 페리에서 만난 죤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섬의 유일한 식료품점 주인으로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나를 안내하겠다며 자기 차에 태웠다. 대중교통이라고는 하루 한 번 우체부가 모는 마이크로버스가 전부이기에 당연히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가는 도중에 고인돌 모양의 거석을 구경시켜 주고 증류소 책임자에게 소개해 주는 등의 친절을 베푼 죤. 이십 년 넘게 지난 지금도 감사함을 잊지 못한다.     


미카엘은 쥬라 양조장의 공장장이다. 정말이지 그도 왜 그렇게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는가를 반추하면 할수록 더 행복하다. 온 증류소를 구석구석 데리고 다니며 시설을 보여주고 요소요소마다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틀에 짜인 대규모 디스틸러리 투어가 아닌 일대일 견학이었다. 상업적 투어 프로그램이 따로 없었음으로 의당 비용도 안 들었다. 원료인 보리의 선별부터 최종 제품의 출하까지 위스키 전반에 걸쳐 특히 증류에 관한 많은 것을 익혔다. 실제 현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하였으니 책으로만 배우는 것보다 한층 머릿속으로 쏘옥 잘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런던 WSET 증류주 전문가 과정을 밟을 때에 이해력이 크게 높아졌음을 실감하였다.     

내가 둘러본 쥬라 증류소

"우리 증류소는 몰트를 킬닝(불을 때어 건조시킴)할 때 연료로 피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기 이 섬 전체의 냇물은 피트 내음을 가득 담고 흐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또 피트 연기를 입히면 심히 스모키 해지기 때문이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짙은 향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가 들려준 말이다. 지금 거의 다 잊었어도 캐러멜과 브로콜리 향이 풍기는 쥬라 위스키의 특성을 제대로 설명받았던 기억만큼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그러고 나서 양조장 바로 앞의 펍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미카엘의 친절함은 사람이 그리운 쥬라섬이라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위스키가 피트향도 너무 강하지 않고 감미로우니 너네들 입맛에 꼭 맞을 걸! 고급 싱글 몰트위스키인데 가격도 적당하네. 하나씩들 사가지고 가도록 하셔. 면세점에서 파는 증류주는 대개 1리터짜리 병에 담겨 있으니 일반 상점의 750 밀리리터짜리 보다 크지. 같은 값이라면 공항 것이 훨씬 더 싼 거야"

나는 같이 놀러 간 일행들에게 쥬라 위스키를 추천하였다. 그러잖아도 내가 어떤 종류를 추천할지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은 내 권유에 모두 한 병씩 구입하였다. 물론 나도 샀다.     


제주 공항 면세점에 진열되었던 쥬라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십 년 전의 공짜 위스키 투어의 값을 치른 셈이다.

미카엘이 알기나 하겠냐마는....



PS.

이제 쥬라 증류소는 더 이상 외딴곳이 아니다. 연간 1만 명이 넘는 방문자가 찾는 명소로 변했다. 더불어 단체로 견학하는 디스틸러리 투어가 2011년부터 개설되어 있단다. 

내가 받았던 그런 호사는 앞으로 누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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