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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May 25. 2023

술은 술이다.


“원장님. 롭 로이요.”

“칵테일 잔, 스터, 스카치위스키 1½ 온스에 스위트 버무스 ¾온스,.. 에.. 그리고.. 앙고스트라 비터스 1 대시, 체리 가니시.”    


롭 로이 Rob Roy. 스카치 대신 버번을 넣으면 맨해튼 칵테일이 된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에겐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할지 모르겠다. 기실은 기능사 시험 보러 대전ㅎ대학 실습실로 가던 중 차 안에서 주고받은 대화이다. 상대는 청주 ㅊ대학 4학년 생. 그는 스펙으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조주사(Craftsman Bartender) 자격을 취득하려는 학생이다, 칵테일 조주에 대하여 나와 함께 이제껏 공부를 해온 터이었다.     


“아니요. 레시피 말고 실제로 만드는 것처럼 말해봐요.” 학생은 시험을 코 앞에 두고 긴장을 덜고 싶은지 짐짓 시험관 같은 거만한 태도를 취하며 나에게 명령한다.    

“예, 알겠습니다. 칵테일 잔에 얼음 넣고 다시 얼음 빼내고 그 잔에다가 스카치 1½ 온스 붓고 스위트 버무스 ¾ 온스에.... 앙고스트라 비터스 1대 시, 칵테일 핀에 체리를 끼워 장식하고.”     

나도 그도 세 시간 후면 시험관 앞에서 3가지를 실지 제조해내야만 하는 동병상련의 가련한 수험생 처지다.  


“틀렸어요!”

“으잉? 난 외우는 것엔 자신 있는뎅... 나이는 약간 들었어도.”     

사실 그즈음 기억력이 좀 부실해져 가끔 까막까막하긴 했다. 하지만 해내고자 작정하면 기억력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해 왔다. 이번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레시피를 외워 온 만큼 온통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한창때, 그러니까 대학 2학년 의사학 과목 강의를 통째로 암기하여 시험지에 써낸 오기도 부려 본 나 아니었던가!    


“그럴 리가 있나! 무엇이 잘못됐지?”

“스터(Stir) 기법은요, 먼저 얼음을 믹싱글라스에 담고 주재료와 부재료를 넣어요. 이렇게 칠링 chilling 한 뒤에 잔에 따르는 거예요. 그러니 잔에다 직접 두 재료를 넣는 빌드(Build)와 달라요. 일단 믹싱 글라스(혹은 셰이커 보디)를 이용해 냉각시킨 후에 잔으로 옮겨야 해요.”     

으악! 그래? 

아니, 이거 기초부터 흔들리는군.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큰일인걸!이라고 걱정하면서도 학생이 가르쳐 준 것을 머릿속 한편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다른 걸 몇 개 물어보았는데 나머지는 그럭저럭 맞아 들었다.     



“저는 조주 기법 네 가지는 그런대로 알겠는데 재료와 부재료는 잘 모르겠어요.”

쪽지를 들고 계속 시험 내용을 외우던 그가 답답한 듯 하소연한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물어볼게, 대답해 봐. 줄곧 암송만 하지 말고... 핑크레이디의 레시피가 뭐지?”

나로서도 운전만 하기는 무료하고 복습도 할 겸 물어보았다.     



색이 이쁜 핑크 레이디 칵테일



“넵. 샴페인 잔에 드라이진 1½온스, 우유 1온스, 설탕 1 스푼, 달걀흰자 넣고 셰이킹, 장식은 없고.”

“틀렸네요!”

나도 일부러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 뭐가 잘못됐지요?” 그는 놀라서 되물었다.

“부재료로 설탕 1 티스푼이 아닌 그레나딘 시럽 1 티스푼을 집어넣고  주재료인 드라이 진은 1 온스만 셰이커에 넣어 혼합하면 돼.” 

나는 학생의 틀린 점을 고쳐주게 되어 기분이 째졌다.


“외워도 외워도 이 레시피는 항상 헷갈려요. 어떻게 하지요? 시험 볼 때 혼동이 오면 어떡하나...” 학생은 풀이 죽어 점점 말끝을 흐렸다.     

“그럼 요렇게 암기해 봐요. 핑크빛 옷을 걸친 레이디가 바에 들어왔는데 그녀는 술에 그다지 취하고 싶지 않아. 살도 찌기 싫고. 그래서 저녁 식사보다는 영양분이 든 칵테일을 마시고 싶어 해."

그는 온순한 강아지 마냥 귀를 쫑긋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므로 주재료 드라이 진은 과하지 않게 1온스만 넣고, 부재료는 영양가 있는 우유와 달걀흰자를 쓴다고 상상해 보라고."나는 더욱 신이 났다.

"설탕과 시럽이 엇갈리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렴. 숙녀는 핑크색을 입고 있으니 흰 백설탕 말고 빨간색 그레나딘 시럽을 넣어야 컬러가 맞겠지.'

무척 헷갈리는 핑크 레이디 레시피였지만 내가 외웠던 비법대로 학생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말이야, 설탕에 대해서는 이렇게 확실히 기억해 둬. 여자들은 살찌는 것 싫어하니 설탕은 넣지 말라고. “     



수험생은 시험장에서 

1. 칵테일명에 맞는 각각의 술잔을 고른다.

2. 수십 가지 주재료와 부재료의 정확한 용량을 기억하여 재어 낸다. 

3. 몇 가지 조주 기법에 따라 이를 섞거나 그대로 잔에 따른다. 

4. 장식(Garnish)을 멋지게 덧붙여 내놓는다. 

국가에서 정한 주요 50가지 칵테일 중에서 무작위로 3개를 수험생 앞에서 출제하면 그 자리에서 7분 안에 만들어 내야 한다. 처음 대여섯 종류 레시피를 외울 때는 그런대로 쉽게 기억이 되나 십여 개만 넘어가도 뒤죽박죽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여러 종류의 잔, 주재료인 술과 부재료의 종류와 용량, 조주 방법 거기에다 장식까지 맞추려면 서로 얽히고 설켜 오십 가지가 되면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필기시험은 실기 전에 합격해 두어야 한다. 주류 전반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필기시험이야 나로서는 식은 죽 가장자리 둘러먹기여서 이미 가볍게 통과를 해 두었다. 



”어! 단박에 머릿속에 들어왔어요. 이젠 잊어버리지 않겠어요. 고맙습니다. “ 

학생은 그제야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뭘 나도 도움 받았는데.... 스터는 빌드(Build)와 기법이 완존 다르구먼. 이제야 알았네. “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조주 기법이라 한다. 셰이커에 얼음과 재료를 넣고 공중에 대고 흔들어 혼합하는 쉐이킹이 대표적이고 가장 멋들어진 방식이다. 그 외에 재료의 비중 차이를 이용하여 층을 지게 하는 플로팅(Floating)도 있다. 칵테일마다 어떤 기법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외워두어야 했는데 나는 그중 스터와 빌드를 혼동했었다. 아둔하게도 기법 자체를 아예 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제라도 올바로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이윽고 시험장인 대전 'ㅎ'대학에 들어섰다.


.......

.......,     

"블라디 메리 Bloody Mary, 롭 로이 Rob Roy, 모스크 뮬 Moscow Mule."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시험장의 하얀 보드판 위에 검정 매직펜글씨로 쓰였던 이 세 가지 시험 문제가.

.......

.......    


학생은 무사히 합격하고 또 다른 스펙을 찾아 시방도 줄달음질 친다는 소문이 들린다.

나도 물론 합격하여 조주기능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롭 로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레시피는 그날 이후론 내 머릿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


"산은 산이요. 술은 술이다."




50가지 중요 칵테일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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