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먼저 나를 알아본 사람
오랜만에 만난 전 직장 동료 A님이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문득 던진 말이다.
늘 그렇듯 프로젝트 강행군으로 어디 모르게 퀭하게 보였을 거라
"저 어디 아픈데 없는데요. 어디 안 좋아 보여요?"라며 반문했고,
A님은 나보고 사뭇 진지하게, 본인이 진료를 받는 정신과 진료를 권했다.
"약 먹으면 바로 좋아져요. 꼭 한번 가보세요"
나중에 그녀의 말대로 나는 정신과 진료를 내 발로 찾아갔고,
그렇게 나의 치료는 시작되었다.
A님은 직장동료로 만나, 학교 동문으로 되었다가,
그분의 결혼에도 1프로는 기여했고,
결정적으로 작년에 새로 이사한 집 바로 옆동이
알고 보니 그녀의 집이었으니, 보통의 인연은 아니었다.
A님은 나보다 어리지만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소위 "똑똑한" 분이셨다.
운 좋게도 입사 초기에 그녀와 프로젝트를 함께 할 일이 생겼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나긋나긋한 말투와
정말 완벽에 가까운 업무스킬을 볼 때면,
나도 꼭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되는 동경의 대상.
퇴사 이후,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날 점심시간과 티타임에서 A님은 내게 진료를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상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고,
그날 대화도 딱히 무겁지는 않았었는데,
그냥 좀 요즘 힘 빠지네요 정도?
A님과 이웃이 되면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서로의 집에 초대받아 종종 저녁도 먹고,
날씨 좋은 날 그들 부부와 와인 한 병을 들고
동네 뒷산에서 간단한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근데 그때 제가 어디가 이상했었나요?"
그때 내가 소위 '핀트'가 나가 보였었는지 너무 궁금했다.
내가 그렇게 어둡고 침울해 보였나.
그녀의 답은 정말 의외였다.
"CD님하고 이야기할 때, 꼭 저랑 야기하는 거 같았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운 야기는 별로 안 하고
한숨은 쉬는데 본인 근황은 별로 말 안 하더란다.
그렀던 것 같다.
그 예전에 구로구 보건소 마냥 A님은 내게,
병원 갔다 오셨어요? 약 먹으면 바로 좋아져요!
인사 아닌 인사를 카톡으로 종종 보냈고,
사실 나는 내가 심각하다 생각하진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넘겼다.
하지만 내가 진짜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자
손에 잡히는 것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순간에 빠져들 때
나는 주저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점점 좋아지고 있다.
민방위 훈련에서 배웠던, 응급처치 프로토콜처럼
나는 그 와중에 꽤나 침착했고,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을 알았다.
"병원까지만 오면 치료 다 된 거예요. 그걸 몰라서 그렇지"
A님은 의사 선생님과 똑같은 말을 하며 나를 위로해 줬다.
사실 A님은 나보다 더 오래 우울증을 겪고 있었고,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 했다.
똑 부러지고 내가 동경했던 그녀는 마음의 병이 깊었다.
A님의 심적 부담과 원인은 잘 모르지만,
하지만 그녀답게 똑 부러지게 본인을 치료하고 있었다.
지금은 딴 데로 이사를 가셨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챙겨주시는 고마운 분.
진실로 내 생명의 은인이다.
우울증 커밍아웃 이후 발견한 것은
생각보다 정신과를 다니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다는 점
정말 대수롭지 않게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또는 주변 환자들의 이야기를 말해주곤 한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내 기분은 어떤지
서로 애써 위로하지 않으며, 큰 걱정도 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의사 선생님이 유튜브에서 우울증의 치료를
구불구불한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셨다.
캄캄한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빛이 번쩍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저 덤덤하게 잘 되겠지 생각하면,
언젠가 그 빛에 다다르기를.
그 눈부심이 기다려진다.
*두서없이 적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울증은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 처방을 통해 나아질 수 있는 질병이라 합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며, 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또는 주변 분들을 진단하거나 단정 짓는 행위로 '치료'가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Sigur Ros - Hoppipolla'를 오랫만에 들어보았습니다. 노래만 듣고 저기 꼭 가보고 싶다 느껴지는 힘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