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Nothing is Possible.

기분이 나쁜 게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기분

by 이시몬


제가 우울증이 있어요. 요즘 우울증이 좀 심해졌어요.

라고 주변인들에게 말하면 십중팔구가

'뭐가 그렇게 슬퍼?' 또는, '누가 건드렸어!'

라고 위로를 받게 된다.


울어본 적은 없으니 슬픈 감정은 아니고,

화낸 적도 없으니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니다.

근데 내 기분은 왜 이런 것일까?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이 끝나고 그날 밤 일기장을 작성할 때,

'화생방 가스에 숨이 안 쉬어지고 눈물 콧물 다 쏟아졌던 고통을 어떻게 편지에 써야 표현이 될까'라는 주제로

동기들하고 제법 심각하게 토의를 한 기억이 있다.

"고춧가루를 욕조에 풀어놓고 얼굴을 담그면 저렇게 될 거 같은데..."

"나는 폐를 칼로 찢는 거 같았어"

그때는 나름 진지하게 다들 한 마디씩 했는데.


돌아와서. 우울증 상태의 내 기분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하는 게 좋을까?

벌써 열여덟 번의 글을 쓰면서 마음속을 하나씩 정리하는 중인데,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

나는 과거에 너무 매달려 있어

나는 고민이 너무 많아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적어놓고 보니 현재 기분과 감정의 이야기가 아닌 문제점의 이야기로 보이고,

사실 지금의 내 기분은 어떤가를 그때처럼 표현해보려고 하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공허함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내가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진다.

굳이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고.

그렇게 되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지더라.


다 귀찮아. 굳이?

최근에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사실 이 말은 일이 너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내뱉은 말이라

처음에는 번아웃이라는 게 이런 건가 생각해서

좀 쉬면 괜찮아질까?

연말에 한가해질 때 꽤나 긴 휴가를 가지게 되었지만,

귀찮음은 더해갔다.


휴일에 집 밖에 나가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고

자연히 사람들하고도 멀어졌다.

무의미하게 TV리모컨에서 채널을 계속 바꾸던가,

넷플릭스 추천 영화를 틀고, 끄고를 반복하고


그저 나는 집돌이 집순이 마냥 집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

나는 계속 혼자 있었으니까.

그렇게 별거 아니다 생각하니,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니,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게 되더라.


근데 또 간사하게 밥은 잘해 먹었다.


사실 그 아무것도 아닌 공허 함한 감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사라져도 되지 않을까?

극단적인 생각으로 연결되는 문제다.


침대에 누워 내일 만약 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세상은 아무것도 안 바뀔 것이며,

나도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니

아 이 와중에도 이게 우울증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정신이 팍스니.


사실 치료 전에는 이게 증상인지도 모르고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했다.

금요일 퇴근길에는 밥 먹고 집에 가서 영화나 보다가 자야지.

특히 일요일에는 무조건 집에 있어야 월요일에 안 피곤 하니까라고 생각했고

사실 집에 혼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멋진 싱글라이프다라고 나 스스로도 만족하기도 했다.


근데 사실 집에 혼자 있으면 꽤 많은 걸 할 수 있으면서도

딱히 할 건 없다.

주말 루틴인 집청소와 밀린 집안일을 하고,

커피 한잔 마시면 아직도 오전 11시.

책도 한 권 읽어보려 하지만 그새 귀찮아졌다.

어느새 밥때는 다가오고, 대충 주워 먹다가 보면

아 낮술이나 먹고 한숨 자야지. 그렇게 주말 끝.


푹 쉬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월요일은 힘들다.


누군가는 하나의 우주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우주.

나도 역시 그 하나의 존재일 것이며.

긴 여정이 되겠지만.

이렇게 하나씩 내 존재를 찾아가는 여행을 출발했다.


대학교를 처음 가서 첫 전공 수업에,

인상 좋으셨던 노교수님이

"매여 있는 풍선이 자유로운 거 아세요?"

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셨다.

알고 보니 매 학번, 생애 첫 대학수업에 던지는 레퍼토리였는데,

세상에 나오니 알겠더라.


어디로 날아갈지도 모른 채 날아오른

풍선이 방향을 잡기는 참으로 어려웠네요.

저는 그래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내일모레는 병원에 가는 날이기도 하다.

선생님께 요 며칠간 찾아본 내 이야기를 좀 길게 나누고 와야겠다.



*두서없이 적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울증은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 처방을 통해 나아질 수 있는 질병이라 합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며, 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또는 주변 분들을 진단하거나 단정 짓는 행위로 '치료'가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빅마마-그 빛에 감싸여'를 들으며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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