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후회가 아물어가는 방식

기억은 지우는 게 아니라, 결국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by 이시몬

어제 쓴 글이 쓸데없는 고민을

진짜 쓸데없는 '짓'이라 마음먹었고,

조금은 그렇게 쓸데없는 고민을 덜 해보고자 시도하는 중인데.

고민 보다 내 맘을 수렁텅이로 담그는 요소는

과거의 기억이다.


타임머신이라는 소재가 나오는 걸 보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열망은

나뿐만 아닌 보편적인 요소 같은데.


내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나는 역사를 바꿔보거나,

비트코인을 사서 떼부자가 될 생각보다.

과거의 내가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서,

아니면 결정적인 상황 앞에 마주한 내게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과거의 기억과 회상은 후회로 연결된다.

겉으로 나는 똑똑한 척하지만 실상은

깨달음이 매우 늦는 '이해가 느린' 사람이었더라.


어른들이, 아니 조상들이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나이가 먹어 이해가 되더라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아닌

현실에 대한 인식이 늦은 게 맞는 것 같더라.


나중에 다하면 되지라는 게으름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이건 필요 없어라고 건방지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어린 시절에서 왔을 수도 있고


먹고사는데 이게 왜 필요해!

라고 생각했던 고등학교 물리의 내용이

나이 먹고 나니 어렴풋이 기억나며 다시 찾아보거나,

영어시간에 그냥 단어만 잘 알면 되지 하며 외면했던

영문법을 다시 공부한다던가.

이건 공부하는 재미라도 있지.



현실에 대한 늦은 자각도 매우 느린 편이다.

어릴 때 남들은 취업공부다 뭐다 할 때,

차피 현장 나가서 구르면 몇 년 안에 뭐 되지 않겠어.

청약저축은 뭐더라.

부동산 공부를 해보니 뭐가 좋더라.

재테크는 뭐 어떻게 해야 하더라

월세보다는 전세가 낫더라.


재테크는커녕 돈이 없었던 시절이거니와

하루하루 해야 될 일 투성이에 귓등으로 흘렸던 일들이

그저 어른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야기들이

알고 보니 남들은 다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고,

나만 뒤 쳐 저 있더라.


그래도 이건 괜찮았다.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재산과 사회적 척도보다 그래도 더 중요한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그래도 믿고 싶었기에.


사실, 나이가 먹고 나니.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사는 지금이라 이런 푸념을 하는 것일 수도.



요즘 들어 부쩍 과거를 후회하는 이유는

그 후회되는 과거를 계속 불러오는 이유가

우울하고 불안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내가 불안하고 우울해서

후회되는 기억을 소환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What if
만약 거기서 내가 한 번만 더 잘못했다고 빌었더라면,
그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갔었더라면,
가만있지 말고 말이라도 한번 해볼걸.


정말 찌질하게도 그때는 자신 없었던 행동과 말들이

상상 속의 내가 말하고,

내가 원하는 결말로 나아가는 상상이 계속되면

그 잠깐은 마음이 편해지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비참함은 정말 어둠 그 자체다.


우울증 환자의 공통된 증상이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란다.



나는 무언가 의미가 깃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그동안 떠났던 여행지의 비행기 표와 지난 여권들

우리 집 고양이가 아기 었을 때 가지고 놀았던

지금은 시큰둥한 장난감부터

헤어진 연인의 흔적이 이사를 몇 번을 했음에도

아직도 집에서 묻어 나오고 있으니...


사실 이런 성격은 부모님도 비슷한 것 같다.

아버지의 첫차를 폐차시키던 날

더 좋은 차를 샀음에도

"사고 한번 없이 그래도 전국 구석구석 돌아다니게 해 준 고마운 차였지"

하루 종일 우리 집은 침울했었다.

집에서 정말 옛날 물건이 나오면

"그건 차마 못 버리겠더라" 하고 웃는 우리 엄마.

나랑 똑같네.


누구는 그런 것들을 싹 치워 버리라고 하는데.

힘을 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아픈 기억이지만 내가 그래도 살아온 증언 같아서



내게 과거의 기억을 계속 회상하는 이유를 오늘 묻다 보니

빙돌려서 야기하지만 딱 잘라 말하면,

후회되고 미련이 남아서다. 근데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단지

그렇게 아픈 과거를 계속 불러오면

상처에 딱지가 앉고, 흉터만 살짝 남듯이

익숙해지고 무덤덤 해지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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