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우울증과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덜 붙잡고 놓아주니, 생각보다 버틸만하더이다.

by 이시몬

*적어놓고 보니 정확히는 치료 중인 우울증 환자의 날들이 맞는 제목인 것 같습니다.


치료를 받은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사실 나는 내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각하지 못한다.


캘린더에 추가해 놓은 병원 예약이 다가올 때나,

아니면 매일 아침, 자기 전에 약을 먹을 때서야

내가 치료를 받고 있음을 문득 기억한다.



졸리긴 하다.

처음 우울증 약을 복용했을 때는 정말 미친 듯이 졸렸었다.

핸드폰 알람이 울려도 못 깨어나고,

출근 버스 안에서 잠들다 한정거장을 더 가고,

심지어는 사무실 소파에서 누워서 정말 깊은 잠을 자기도 했다.

요즘에도 점심시간에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바로 잠이 든다.

그 말인즉슨, 밤에 푹 잘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잠귀가 매우 매우 밝은 편이었고,

잘 때 꿈도 많이 꾸곤 했다. 거의 매일 꿈을 꾸었으니.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그 생각에 한참을 잠을 못 이루곤 했다.


잠 못 자는 게 딱히 스트레스가 되진 않았다.

잠을 안 자는 시간에 무언가 다른 걸 할 수 있었으니

딱히 자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어제 하던 업무를 계속 이어가기도 하고,

이상한 생각을 날이 샐 때까지 하기도 하고.


무슨 약을 처방해 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꿀잠을 자고 있다.

잠을 잘 잠으로서 생기는 긍정적인 효과도 많다.

예민함, 신경질이 예전보다는 아주 많이 무던해졌고,

하루에 몇 잔씩 먹던 커피도 많이 줄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당연한 것에 대한 만족.

내가 가장 체감하고 있는 첫 번째 효과.



너무 높게 보려 하지 않아 졌다.

생각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더라.

제안서에 오타가 있더라도, 시안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게 그렇게 패착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입찰에 떨어져도, 왜 떨어졌을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인정하면 될 일임을.

아쉬우면 그다음에 또 잘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주변의 도움이 크다.

내가 우울증임을 고백하니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질 때가 있다.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확실히 덜어졌고,

불만이나 고민, 또는 화를 내 앞에서는 잘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꼭 혼자 이고지고 안 해도 일이 되는 경험을 하고 있고,

적당히 업무를 나눠하는 법도 배웠다.



스스로 흘러 넘기는 것.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나 스스로 회피하거나 거부하며,

감정의 소모를 예방하는 방법을 애쓰고 있다.


예전 같으면 아등바등 쥐어짜며

꾹꾹 눌러가며 했을 일들을 적당히 미루거나

넘기는 여유를 익혀가는 중이다.

나 자신을 목 조르는 상황에서 굳이 힘쓰지 않는 법

우울증의 나 자신과 타협하는 중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그동안 남에게 눈치 보면서 하지 못했던

하고 싶은 말은 웬만하면 다 하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무 감정에 휘둘려서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

불편한 이야기도 정확히 잘 전달하면,

굳이 필요 없는 감정 소모도 없더라.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

꼭 정답이 있어야 할까? 꼭 하나만 골라야 할까?

강박적으로 최적의 루트를 찾는 강박도

조금씩 더디지만 내려놓고 있다.


모 아니면 도가 아님을.

적당한 타협도 필요하고, 굳이 꼭 성공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업무가 맘에 안 들면 다시 하면 되고,

모르면 물어봐도 되고,

붙잡고 있어도 답안 나오는 것은 과감하게 스킵해도 되고,


그렇게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 것과

편한 길로 돌아가거나 내려놓아도

생각보다 별 차이 없더라.



이게 몇 년간의 우울증 치료의 효과인지,

나 자신에게 관대해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심적인 무게가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그래도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다.

요 며칠 정말 감정기복이 심해

브런치스토리에 징징대며 글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말이다.

우울증과 함께 사는 법.

(치료를 받으면) 생각보다 버틸만하더라.

그러니 모두 오늘도 아무 생각 없는 굿 나잇이 되기를.



*두서없이 적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울증은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 처방을 통해 나아질 수 있는 질병이라 합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며, 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또는 주변 분들을 진단하거나 단정 짓는 행위로 '치료'가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들은 노래는 '태연-만약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ep.14] 참고 참으니 우울이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