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by 싸이먼K


엄마는 22살쯤에 26살쯤 되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다른 도시 친구들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도 챙긴다지만 우리 부모님은 결혼기념일이 언제인 지 알려 주시지 않으셨다. 분명 기억해 내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그런 것 챙길 만큼 삶이 녹록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게다.


엄마가 결혼할 때, 엄마가 살던 진양군 OO리라는 곳에서 마을 머슴이 이불짐을 지게에 지고 따라왔다고 했다. 결혼하고 바로 아버지는 양산의 직장으로 떠나고 엄마는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시 양산의 축협에 근무하셨다고 했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큰엄마, 큰아버지, 결혼 안 한 삼촌들, 고모들, 사촌들, 그리고 일하는 머슴들 해서 아침을 차리면 밥그릇 수가 빠짐이 없는지 열몇 개를 세어야 하고, 학교를 다니는 삼촌, 고모들, 사촌형, 누나들 도시락도 싸야 했다고 한다.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인 ‘대문집’ 둘째 며느리였지만, 삼천포 일대에서 제일 구두쇠로 유명한 시할머니가 일구어 놓은 집에서의 시집살이였다. 바싹 말라서 잘 타는 나무들은 장에 내다 팔아야 해서, 항상 젖은 솔가지로 아궁이에 불을 때자면 항상 눈물을 쏙 빼야 하는 것이 시집살이 처음 시작할 때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밥을 푸기 전 설거지해 놓은 그릇들을 마른 수건으로 다시 닦게 하는 나이 어린 시누이 큰 고모도 은근히 미웠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얼마나 했는지, 아버지가 어느 날 오셔서 이제 같이 살게 따라나서라고 했을 때, 제대로 된 집이 있는지, 세간들은 있는지, 어디서 살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버선발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시집살이보다는 낫겠지 싶었다고 한다. 따라가서 보니 당연히 남의 집 단칸방에 세를 얻어 살게 되었는데, 변변한 가구가 없어서 나무 상자를 식탁 삼아 밥을 먹어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 되셨다. 내가 그나마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남해군 OO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처음 잡았다. 엄마는 소위 ‘선생님 사모님’이 되었다. 여전히 남의 집에서 세를 살았었다.


내가 6살 즈음에 삼천포에 우리 집을 짓기 시작했다. 엄마를 따라 도선을 타고 삼천포에 나가 우리 집 짓는 현장을 본 적이 있다. 엄청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고향을 찾아오신 건지 아버지는 삼천포 여고, 삼천포 중학교, 여중의 수학선생님 생활을 은퇴하실 때까지 하셨다.


엄마는 선생님 사모님이었지만, 살기가 팍팍했는지 부업을 하셨다. 쥐포 공장에도 다니셨다. 쥐포공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벌어서 집의 세간살이 바꾸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하셨다. 늘 이웃집 누구 엄마는 손이 빠르고 건강해서 많이 버는데, 당신은 손도 느리고 자주 아파서 수입이 적다고 불평이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지난겨울쯤 어디서 끌고 온 누렁이를 복날이 되면 잡아서 아버지의 동료 선생님들을 대접해야 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사람이 하는 개고기 요리가 잡냄새도 안 나고 맛있다며 자랑스러워하셨지만, 엄마는 매년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싶은데도 아버지의 ‘자랑스러움’ 또는 ‘인심’을 위해서 그 일을 해 내야 했었다. 나는 학교 갔다 오면 꼬리 치던 누렁이의 모습을 찾다가 찜통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는 꿈이 많으셨다. 일대에서 제일 부잣집 둘째 아들에다, 일대에서 몇 안 되는 대학 나온 사람이라서였는 지, 할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일찍 받으셨다. 유산이라는 것이 대부분 땅뙈기였을 텐데, 아버지는 고향의 땅을 팔아서 낙동강에 모래를 싣고 다니는 바지선을 샀다가 홍수에 떠 내려가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고, 이발사를 고용해서 이발소도 차렸었는데, 이발사가 돈을 들고 도망을 가버려서 돈을 다 날렸다고 했다. 나중에는 흑염소 농장을 차리셨다. 학교 선생님을 하시면서 따로 벌인 일이셨다. 와룡산 중턱에 집도 짓고, 울타리를 쳐서, 제일 많을 때 염소가 150마리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투자한 것 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사업이었지 싶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생님이 되긴 했지만, 원래 전공한 축산학에 미련이 있었고,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목장주가 되는 꿈이 있었다고 한참 후에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가 흑염소 농장 계획을 엄마에게 말씀하시자 엄마는 당연히 반대하셨다. ‘아이구 아버님한테 물려받은 거 그 마이 까 묵었으면 됐지 인자 쪼끔 남아 있는 거 그것도 팔아 묵으끼요. 고마 당신 조용히 선생이나 했으면 우리 지금도 편하게 살낀데, 또 머할라꼬 일을 벌릴라 카요. 몬한다. 하지마소!’ 했고, 아버지는 밥상을 엎었다. 어떤 반대도 무릅쓰고 하신다는 뜻이었다. 학교를 다녀왔는데, 엄마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엄마가 영영 우리를 버리고 갔나 싶어 한참을 울고, 걱정하고, 혹시 외갓집 가셨나 싶어 전화도 했었는데, 저녁밥을 먹을 때쯤 엄마는 우리의 저녁이 걱정이 되었는지 돌아오셨다. 아무 말없이 저녁을 차려주셨다.


며칠 후 엄마는 아버지께 ‘나한테 도와달라꼬는 카지 마소. 나는 모르요. 혼자서 선생도 하고 농장도 하고 알아서 하소.’ 했는데, 웬걸 엄마는 농장을 만드는 데 일손도 보태고, 아버지가 염소 사료도 안 주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때로는 버스를 타고, 때로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염소 떼들을 보살폈다. 결론적으로 그 농장은 대실패였다. 염소들은 울타리 아래를 뚫고 도망을 가고, 병든 줄 모르고 산 염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도망간 염소를 찾으러 다녔다. 제일 비쌀 때 사서 제일 쌀 때 팔았다. 결국 아버지는 5년쯤 지난 후 농장을 닫았다. 우리는 돈을 잃었고, 엄마는 그때 염소 살피러 다니느라 허리가 안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 중 딱 하나 성공한 것이 사슴 농장이었다. 아버지는 은퇴하시기 몇 년 전에 마지막 남은 텃밭에다 사슴 농장을 지었다. 이번에는 5마리 정도를 키우시겠다고 염소 농장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로 하신다기에 큰 반대가 없었다. 적당한 규모였고, 수입도 괜찮았다. 농장에 간 김에 텃밭을 일궈서 채소들도 먹고, 일석이조였다.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가지기 몇 년 전까지 소일거리 삼아 사슴을 돌보셔서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고, 연금 이외의 상당한 수입도 챙겼다. 엄마는 ‘너거 아부지 한 거 중에 제일 잘한 일이다.’하셨다. 그 텃밭을 엄마는 아직도 일구고 계신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으로서도 참 열심이셨지만 진짜 꿈은 농장주였던 것 같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 곁에서 ‘선생님 사모님’으로 아버지 사업의 마지못한 지원자로 사셨다. 아버지는 엄마의 어떤 반대도 무시하고 하고 싶은 걸 하셨다. 그 당시 가부장제 시절의 거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도 커야 했고, 호탕해야 했고, ‘마누라의 잔소리’ 쯤은 무시했어야 했다. 그런 시절을 보면서 울 엄마가 더 아깝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가 연세가 들어 병을 얻고, 나중에는 엄마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상황을 몇 년을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2~3년 동안은 특히 엄마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엄마, 아버지 많이 편찮으셔서 간병하시느라 힘드셨지요? 자식들이 도움도 못 되어 드리고. 아버지 돌아가셔서 많이 슬프고 서운하지만 또 이제 안 아프시니 편히 잘 가셨다 싶지도 않으세요?’하고 여쭌 적이 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아니 야 봐라, 너거 아부지 내 아무리 힘들게 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거동도 못했도, 내 곁에서 그냥 숨 쉬고 누워만 있어도 나는 그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서운하기만 하지 잘 가셨다 싶은 생각은 별로 안 든다.’ 하셨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큰 수술을 몇 번 하셨다. 수술방에 들어가기 전에 꼭 유언 같은 걸 하셨는데, 항상 말씀은 똑같았다고 한다. “내 그동안 덕분에 들 잘 살았다. 고맙다. 그라고, 내 꼬옥 부탁 좀 하자. 너거 엄마 꼬옥 좀 부탁하꾸마. 너거 엄마 좀 잘 챙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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