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집을 걷고, 내가 걸었던 날들

가까워진 건 거리보다 나 자신이었다

by 생활미감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이제 아침이 다르게 시작된다.

눈을 떴을 때,

한 번쯤 누워 있어도 되는 여유가 생겼다.

화장실 앞에서 줄 설 필요도 없고,

우리 아들 혹시나 조금이라도 더 클까 싶어

바쁜 아침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고기 굽는 시간도 사라졌다.


출근길. 걷는다.

초록이 숲처럼 번지는 공원을 지나,

낮게 깔린 빛과 바람 속을 걷는다.

그리곤 어느새 도착해 있다.

숨이 차지 않는다. 마음이 가볍다.


예전에는 그랬다.

새벽같이 일어나 허겁지겁 움직였고,

길 위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 전 아들을 내려주고,

차 안에서 또 하루치의 기력을 다 쏟고 나면

하루는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점심도, 저녁도,

가족과 마주한 순간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게 몇 년이었다.


그런데 이사 후 첫 월요일,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걸어서 도착한 사무실, 맑아진 정신,

점심시간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들과 식사를 하고,

소파에 살짝 누웠다가 다시 회사로 향했다.

짧은 휴식 하나가 남은 하루를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

내가 미뤄왔던 일들을 한 번에 끝내며 알았다.


오후의 피로도 걸으면서 풀린다.

저녁에도 걷는다.

어스름한 초록이 짙게 스며든 공원을 지나,

불빛을 따라 집에 다가가면서

'이게 가능한 삶이었구나' 싶었다.


도착하면 아들과 밥을 먹고,

분리수거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그런데도 시간이 남는다.


음악을 틀고, 불을 낮춘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새벽 5시 반.

오늘따라 일찍 눈이 떠졌다.

창밖엔 초록이 번지고 있었다.

놀랍도록 조용하다.

이전 집에선 항상 무언가가 웅웅대곤 했는데,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서도

숲 속에 들어앉은 것 같다.


이 여유, 나를 위한 선택들의 결과다.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따뜻하게.

오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아, 그런데... 다시 졸리다. 다시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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