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공간, 질질 끄는 꿈
남편 방 벽과 내 방 벽 사이,
폭 800㎜짜리 픽스창 앞 짧은 복도.
채광 따라 방을 더 만든다고 구조를 바꾸다
철거 못하는 공용전화선을 발견했고, 멘붕에 빠졌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다- 어쩌다 생긴, 덤 같은 공간.
그런데 빛이 들고, 창밖엔 초록이 있었다.
문은 없지만, 마음만은 내 자리였다.
지금?
완전 짐창고다.
철 지난 나름 명품 가방, 책, CD, 보따리…
심지어 8년 전 미국에서 가져온
뜯지 못한 해운 상자도 버티고 있다.
다들 “문 달고 선반 달자”고 했다.
나도 흔들렸다.
딱 봐도 ‘수납해!’라고 말하는 구조니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작업 테이블, 요가 매트, 작은 실내자전거…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명상을 하는 나.
욕심일까?
아크릴화부터 시작했다.
싸고 빨리 마른다니까.
“화가라면 유화쯤은…” 하며
온갖 재료 고오급으로 장만했지만
반의 반도 못 썼다.
오일파스텔? “그게 쉽다”는 말에
색상 많고 비싼 걸로 샀다.
남편은 “문방구 차릴래?” 하고
아들은 “또 뭐 샀어?” 하며 지나간다.
아무리 그래도 이 꿈만은 안 버려진다.
잘 그리지 못해도, 매번 질질 끌어도...
“난 잘 모르겠지만 계속 좋아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또 그림 관련 책들.
특히 데이비드 호크니 책은
우리말로 나온 건 거의 다 샀다.
고덕에서 열렸던 전시는 N차 관람.
호크니를 생각하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화풍, 철학, 고집, 변화... 다 좋다.
이번 주말엔 이케아에 간다.
픽스창 앞을 정리할 슬림한 수납장이 필요하다.
싸 보이면 안 된다.
이건 단순 ‘정리용 가구’가 아니라
꿈을 숨겨둘 서랍이니까.
참, 집 전체 창호는 보통 새시로 했지만
이 픽스창만 시스템창으로 바꿨다.
난 그런 창이 좋다.
바로 열리지 않고, 살짝 거리를 두는 창.
어릴 적 동화책,
미국 골목길을 산책할 때 설레게 했던 바로 그 창.
창밖 풍경은 별거 없지만,
창 앞에 서면 마음이 뛴다.
그 기분 하나면 충분하다.
정리도 안 됐고, 작품도 없지만…
믿는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내 색이 번질 거라고.
유화든 파스텔이든, 아이패드 드로잉이든.
열리지 않는 창 앞에서
나는 내 안의 창을 천천히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