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모차르트와 유재하

그리고 내 방

by 생활미감

새벽 6시.

밖엔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다.

비 때문은 아니지만,

잠결에 몇 번이나 깼던 지난한 밤을 지나

일단 커피를 내렸다.

회사 일이 잔상처럼 꿈에까지 등장했다.

그들이 내 꿈에서 주연처럼 활약하다니,

아침이 개운치 않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나무와 초록이 내려다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내 뒤엔 800mm 픽스창.

남편 방과 내 방 사이, 짧은 복도에는

여전히 짐이 가득하다.

‘어서 치워야지…’ 중얼거리며,

덤처럼 주어진 이 고요한 시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에어팟을 낀다.


애플 클래식.

생각을 정리하는 1차 단계이자,

몰입 전 거치는 작고 사적인 의식.

어쩌다 보니 애플빠가 되었지만,

클래식 앱만큼은 진심으로 고맙다.

유튜브 스트리밍이나 누군가가 만든 리스트와는 달리,

내가 직접 참여하는 디깅의 기쁨이 있다.

앨범 자켓이 뜨고, 연주자나 지휘자, 녹음 시기까지—

궁금한 만큼 파고들 수 있다.

단순한 청취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탐험하는 감각.


무작위 재생에서도 우연한 발견이 자주 있다.

나는 바이올린의 초절기교나

날카로운 연주는 선호하지 않는다.

서정적이고, 영롱하거나,

우수에 젖은 음악을 더 좋아한다.

교향곡보다는 소품집을 즐겨 듣고,

감정이 격해질 땐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 1악장이나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 같은 곡을

반복 재생하며 나를 다스린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1악장 모데라토


그래서 직접 모은 플레이리스트도 여럿이지만,

이런 아침엔 그저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다.

MBTI는 J지만, 음악만큼은

즉흥을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예기치 못한 선율이 마음을 건드릴 때,

나는 가장 충만해진다.


오늘은 그 곡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었다.

자주 듣던 곡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다.

특히 클라리넷이 가장 먼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클라리넷이란 악기는 말수가 적지만 감정은 깊고,

조용하지만 홀로 무대를 채운다.

마치 내 안의 어떤 마음이

그 악기를 빌려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


모차르트가 죽기 두 달 전 남긴 마지막 악기 협주곡.

이 클라리넷 협주곡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 같기도,

남겨진 이들을 위한 조용한 위로 같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에 다다랐다.

그 노래는 시작부터 클라리넷이 등장한다.

맑고 수줍은 선율 뒤를 플루트가 속삭이듯 따라붙고,

분홍빛 아침 공기처럼 설렘과 멍함이 교차한다.

노랫말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음악은 감정을 데려간다.


중반부에는 전자기타와 드럼이 등장해

박자를 끌고 가고,

보컬이 사라진 자리엔 음악이 말을 잇는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도

결국 말하지 못한 나머지를,

악기가 대신 전해주는 듯하다.


유재하는 클래식을 전공한 작곡가였고,

모차르트는 고전 음악의 본질 그 자체였다.

시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통해

‘말보다 앞선 감정’을 건넸다.


그 선율은 속삭였다.

“토닥토닥. 잘하고 있어. 용기를 내.”


이 작은 방엔

내가 만들고 쌓아 올린 것들이 있다.

음악이 흐르고, 책상이 있고,

마음이 잠시 머무는 자리가 있다.

그 위에 음악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나를 ‘순간수집가’라고 적어두었다.

공간에서 찾은 영감을 나누고 싶어,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한다.

표현되지 못하고 억눌렸던

이야기와 감정들이 하나둘 끄집어내어 져,

씨줄과 날줄처럼 하루하루 엮여 간다.

음악도, 디자인도, 미술도—

이 방 안에서는 하나의 감각으로 엮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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