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어떻게 살 것인가

'섬집아기'가 불러낸 기억들

by 생활미감

이번이 세 번째 리모델링입니다. 78년생 아파트라 몇 년 안에 철거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이 공간을 다시 고쳐보기로 했습니다.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백 번 양보해서 단정하고 하얗게, 유행보다 우리의 동선을 중심으로. 거실은 줄이고 각자의 방을 만들며, 실용성과 온기를 동시에 품는 공간을 구상했습니다.


부엌창 너머 풍경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누군가 건넨 책 한 권. 흰 표지에 단정한 제목, 『월간 생활 도구』. 처음엔 디자인북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보다 깊은 감정이 훅, 훅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책은 단순히 물건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건을 둘러싼 기억, 그걸 만든 사람과 쓰는 사람, 그리고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월간 생활 도구 / 김자영, 이진주


가장 오래 머문 페이지는 오르골 챕터였습니다. 장인이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둥근 오르골. 그 안에 담긴 곡은 '피가로의 결혼' 중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 그 곡을 들으며 아이가 잠이 드는 장면을 읽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날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포대기에 아들을 업고 희미하게 '섬집아기'를 불러주던 시절. 잠들지 않는 아이를 안고, 흔들고, 다시 걷고 또 안던 나날들. 바닷소리에 잠든 아기를 두고 굴을 따러 간 엄마가 아기 생각에 다 채우지 못한 바구니를 들고 급히 달려온다는 그 노랫말처럼—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도 퇴근길엔 아이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습니다. 책 속 오르골이 제 오랜 기억을 소환했던 것이지요.


책 속 오르골 부분




10년도 넘은 소파, 안락의자, 커피테이블 그리고 루이스폴센 판텔라 조명


물건은 시간의 그릇


저는 오래된 물건을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의자 하나, 안락의자 하나도 신중하게 고르고 오래 씁니다. 10년도 넘은 소파, 커피테이블, 루이스폴센 판텔라 조명. 이것들은 그냥 가구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온 시간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물건의 '역사'까지 곰곰히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았는데, 책은 그런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물건은 단지 쓰임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삶을 품고 있는지 묻는 존재임을 새삼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집이 제게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들의 낡은 축구공



이제 아들은 사춘기를 지나 제 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가끔 치킨을 시킬 때만 방에서 나와 잠깐 얼굴을 비추는 아이. 저는 그 아이를 짝사랑하듯 바라봅니다.


몇 년 뒤면 미국으로 떠날 아이. 물리적으로도 멀어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들이 더 간절하게 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집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이 낡은 공간 안에 우리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위해서요.


이번 집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짧게 머물 수도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집에서도 또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집은 기억이 되고 물건은 이야기가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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