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화이트에도 얼굴이 있다

벽지 하나 고르며, 나를 다시 마주하다

by 생활미감

벽지를 고르는 일에

이렇게 오래 마음을 쏟게 될 줄은 몰랐다.

수십 가지 흰색 앞에서 멈칫했던 그 며칠은

어쩌면 내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디아망


오래된 집. 모든 벽을 허물진 않았기에

미세하게 뒤틀린 평면과

삐뚤어진 선들이 눈에 밟혔다.

그 어긋남을 감추기 위해

결국 벽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처음엔 비용을 아껴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디아망을 선택했다.

고급 벽지의 대명사, 디아망.

질감을 살린 회벽 크림, 모던회벽 화이트…

인테리어를 해본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이번엔 신상도 나왔다고 했다.

디자인 실장님이 펼쳐주신

두꺼운 샘플북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쏘매니 옵션, 아니 투매니 옵션.

질감, 톤, 광도, 색온도…

미묘하게 다른 수십 가지 흰색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디아망 신상 샘플북 중 베스트라인 부분


다행히 패턴은 금방 골랐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거 말고,

이번엔 새로 출시된 ‘마띠에르’ 라인 중 하나.

너무 크지 않게 오돌토돌, 징그럽지 않은 그 패턴.

회벽 질감을 섬세하게 재현한 무늬.

손끝으로 느껴지는 거친 결.

딱 내 취향이었는지도 모른다.


디아망 마띠에르 라인 부분


내가 그 질감에 유독 끌렸던 데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 3년 살던 시절,

우리는 렌트한 집 두 곳에서 지냈다.

그곳에선 누가 새로 이사 오면

벽을 새로 페인트칠하곤 했다.

청바지 입고 함께 붓을 들고 칠하는 장면,

영화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있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도장은 단순히 색이 아니라, ‘표면의 숨결’이라는 걸.


첫 번째로 살았던 2층짜리 싱글하우스에선

방마다 벽색이 달랐다.

공용부는 따뜻한 베이지, 안방은 하늘빛, 서재는 겨자색.

두 번째로 옮긴 투베드룸 아파트는

전체가 웜한 화이트였는데,

그 색조차 햇빛에 따라 은은히 변주되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그 오돌토돌하고 거친 벽 표면이 편안했다.

찍히면 어떡하나, 지문 남으면 안 되겠지—

그런 강박 없이 숨 쉴 수 있는 벽.


나는 한국에서 흔히들 하는

매끈한 평탄 도장은 끌리지 않았다.

비용도 너무 높았고, 애초 선택지엔 없었다.

예쁘긴 해도,

나는 그 벽을 보면 왠지 모르게 불편해진다.

깨끗하게만 살아야 할 것 같은 부담,

얼룩 하나에도 마음이 조이는 압박감.

그 모든 걸 ‘마띠에르’ 질감은 해소해 줄 것 같았다.

결이 살아 있고,

빛에 따라 감촉이 달라지는 그 표면이,

내 마음까지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화이트의 얼굴

하지만 문제는 색이었다.

고공디자인 대표님, 실장님, 그리고 디자이너인 내 동생까지도

블랑그레이지가 딱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방 벽과 아일랜드를 오크 계열 우드로 할 예정이라

벽지엔 회색을 한 방울 넣으면

세련되고 조화로울 거라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불안했다.

우리 집은 거실을 줄이고 각자의 방을 나누는 구조라

전체적으로 채광이 아주 넉넉하진 않다.

주방도 베란다 확장을 하지 않아

창이 작고 빛이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

여기에 회색 계열 벽지를 하면,

공간이 칙칙해 보이진 않을까.

자칫하면 동굴 같아지진 않을까.

그런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세 명의 전문가가 블랑그레이지를 추천했지만,

내 마음은 크림 쪽으로 더 기울고 있었다.

샘플을 들고 하루 종일 시험해 봤다.

아침 햇살 아래, 오후 그림자 아래,

밤의 3000K 전구 조명 아래.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형광등 없는 자연광에서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건 ‘마띠에르 크림’이었다.


현장에 가서 필름이랑 대보는 중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내 속마음은 ‘노’였다.

확신은 없었지만,

미묘하게 어두운 기운이 스밀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나는 병원처럼 쨍하고 차가운 분위기보다는,

더 따뜻하고 밝은 집을 원했다.

우리의 오크 계열 우드가 발랄하고 산뜻하게

우리 가족의 기운을 밝혀줄

그런 크림색을 원했다.


중간에 ‘그럼 공간마다 나눠볼까?’라는

절충안도 떠올랐지만,

그럴 경우 재단 로스가 커져 비용도 훌쩍 올라간다.

결국, 하나의 색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어제는 도배를 위한 밑작업이 끝나고,

벽지가 도착했다.

쌓여 있는 박스. 미리 본 실물은 생각보다 밝았다.

‘어, 이 정도면 괜찮을지도?’ ’ 아닌가?‘

살짝 안심이 되기도 했고, 또다시 흔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그 벽지가 실제로 우리 집 벽 위에 올라간다.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내 선택이 맞았을까, 또 한 번 흔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 벽지 위에 하루하루 살아갈 우리 가족의 시간들이 그려진다.


벽지는 배경이 아니라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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