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기를 기다리며
도배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대신 마음이 툭, 내려앉았다.
‘내가 고른 이 벽지… 맞는 선택이었을까?’
모두가 말렸던 선택
크림색 마띠에르. 분명 수십 장의 샘플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붙잡고 고민했던 색이었다. 다들 블랑그레이지를 권했지만, 나는 이 색이 끌렸다. 그런데 막상 사진으로 본 벽지는 놀랄 만큼 하얗고, 놀랄 만큼 비어 있었다.
‘너무 하얀가?’
‘따뜻한 느낌 맞.겠.지?’
그렇게 머릿속이 소용돌이치는 와중, 현장팀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은 출입하시면 안 됩니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압이 바뀌어 도배가 들뜰 수 있어요.”
순간 멈췄다. 이미 옷을 챙겨 입고 현장을 향하던 발길,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제 막 끝난 도배, 아직은 직접 볼 수 없어 불안한 상태. 마치 내 마음도, 아직 마르지 않은 벽지처럼 조심스럽고 불안정했다.
엉성한 아름다움 앞에서
그 길로 나는 서초동 서리풀공원으로 향했다. 내가 임시로 머무는 집 바로 앞, 평소엔 창밖으로만 내려다보던 그 언덕. 직접 걸어보니 꽤 가파른 산이었고, 공원은 정성스레 조성돼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이름부터 낯선 '몽마르뜨공원'에 다다랐다. 프랑스풍을 지향한 듯. 고흐, 피카소 등 화가 표지물, 미라보다리 등 시 구절들, 나름의 정성이 느껴지는 조형물과 꽃들. 완벽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애정이 깃든 공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어딘가 어색하지만 정성스러운 분위기가 지금의 내 마음과 겹쳐졌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지만, 애써 꾸며놓은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도시 한가운데서 만난 낯선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완전하지 않아서 더 솔직해진 지금의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겹치고 흐르는 순간들
멀리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시위대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연에 푹 파묻힌 듯했던 서리풀 언덕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속 흔들리는 목소리, 음악.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곳은 서울 한복판이었다. 대법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초와 반포가 교차하는 수많은 이슈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지점. 이질적인 장면과 감정이 겹쳐 흐르는 순간. 그 한가운데에서 나 혼자, ‘도배된 집도, 도배된 마음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삼켜내고 있었다.
마르기를 기다리며
이제는 기다리는 시간. 잘 마르기를, 자리 잡기를, 내가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흔들리던 오늘 하루도 이 집 어딘가에 스며들듯, 조용히 덧발라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