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첫 가구가 들어오던 날

햇살이 좋았던 아침이었다.

by 생활미감

오늘따라 괜히 일찍 회사 가는 길, 마음이 복잡했다.


요 며칠 사내 게시판은 시끄러운 글들로 가득했고,

내가 맡은 행사들은 표류하듯 결정이 미뤄지고 있었다.

한꺼번에 일이 몰려와 피곤하고 지치는 날들의 연속.

그 한가운데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듯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냥, 들렀다.

우리 집. 우 리 집.



현장은 조용했다.

붙박이 가구를 실은 사다리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고,

문은 열려 있었지만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햇살 좋은 아침, 그 집에 나 혼자 서 있었다.

앞으로 더 아름답고, 집다운 집이 될…

과정에 있는 우리 보금자리.


준비해 온 과자 상자를 어디에 둘까 고민하다가,

거실과 주방 사이 작은 사다리 위에 올려두었다.

빨간 체크 보자기 위에

과즐, 봉지과자, 초콜릿 미니바…

내가 좋아하는 주전부리들을 소복하게 담은 상자.

우리 집을 함께 만들어주는 분들에게

작게나마 마음을 남기고 싶었다.





어제 설치했다는 세면대를 확인했다.

수전이 세면대에 비해 살짝 커 보였지만,

그 비례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바꿔야 하나?' 하다가, '아니, 그냥 가자.' 하며 접었다.


고심해서 고른 어두운 보치아르 타일도 마음에 들었고,

가성비 좋은 누오보 사각 세면대는

단정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고집해서 설치한 일체형 비데는

우리 집 남성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묵직하고 안정적이었다.

걱정했던 조합은 실제로 만나보니 괜찮았다.


쓸고 닦고 싶은 마음이 스르륵 올라왔다.





보호판이 덮인 곳곳,

아직 거친 풍경 속에서 나는

우리가 살아갈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어떤 아침엔 주방 창 너머로

학교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겠지.

어떤 저녁엔 아일랜드 앞에서

식탁에 앉은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남편이 몰래 시킨 치킨이 도착하면

현관 앞 아들의 방 문이 스르륵 열리겠지.

고심해서 고른 펜던트 조명 아래에서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작은 이야기들을 나눌 거다.


그렇게 평범하고 따뜻한 순간들이

이 집에서 살아갈 이유가 될 거다.





햇살이 들어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벽을 바라보았다.

마띠에르 크림색 벽지 위로

창틀 너머 나뭇가지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부드럽고 은은한 질감, 마치 벽이 숨 쉬는 것 같았다.

도배 직후엔 '너무 하얗다' 싶어 당황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왜 이 질감에 그렇게 오래 마음이 머물렀는지.

빛이 벽에 닿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낡은 집을 고치며 내 마음도 함께 보듬는다.


불안은 여전할 거다.

언제 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움과

끝나지 않는 결정 속 피로.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모든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돌고 돌아 다시 찾아온 제2의 고향 여의도.

이 집에서 나는 잘 살아볼 거다.


나답게, 우리답게.


매일 조금씩, 마음을 덧칠하며 살아갈 거다.


"잘 살아봐요. 이 집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07. 도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