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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의 맛

< 뻔뻔한 영화평 - 17> 멜 깁슨이 내란에 대처하는 법

by simpo

# 내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성공한 내란, 실패한 내란. 정의로운 내란, 명분 없는 내란.

군사쿠데타, 친위쿠데타. 좋은 내란? 나쁜 내란? 혁명으로 진화하는 내란... 등등

우리는 최근 최악의 내란을 겪고 있다. 부도덕하고 시대착오적인 정말 나쁜 내란으로

역사에 기록되겠지만 아직 다 끝난 건 아니다. ㅠㅠ

이 참에 영화를 통해 다른 내란 맛 좀 보자.

# '리썰 웨폰(Lethal Weapon)'이라는 영화를 보고 그의 팬이 되었지.

'매드 맥스'로 처음 우리에게 알려진 멜 깁슨!

그가 미치광이 형사로 미친 듯이 보여준 끝내주는 액션이 그립다네.

# '브레이브 하트' 영화 속에는 스코틀랜드 전통 킬트 의상을 입고 있지만,

13세기 스코틀랜드에는 아직 없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 영화에서 완전 악당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나름 능력 있는 군주였어.

'브레이브 하트'가 역사 고증에는 다소 약했던 오락영화에 불과하다는 박한 평가가 있다.

그래서 어쩔 건데?

#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는 잉글랜드에 잡혀서 엄청나게 잔혹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엔딩 장면에서 그가 메리언(소피 마르소)을 떠올리며 "Freedom!" 외칠 때 흐르는 음악

'For the Love of a Princess'... 이거 완전 국뽕... 아니, 스코틀랜드뽕 차오르게 하지

# 멜 깁슨은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 뉴욕 출신이지만 1968년 12살에 호주로 이주했다.

호주에서 자라서 호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듯. 그렇다고 호주 국적자는 또 아니란다. 국적은 아일랜드.

# '패트리어트'의 벤자민 마틴 캐릭터는 은퇴한 전쟁영웅이 농사나 짓고 살려했는데

영국군 때문에 다시 칼 뽑는 설정이다. 그의 아들로 나온 '히스 레저'의 풋풋한 모습을 보니 왠지 짠하다.

# 아일랜드계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멜 깁슨은 실제 8명의 자식을 낳았다.

영화 속 벤자민 마틴의 자애로운 아버지 역할이 그의 본모습이지 않을까?

'리썰 웨폰'의 미치광이 형사는 아닐 거야

# 뻔뻔 평점 둘 다 $$$$ (별 4개. 내란의 맛을 느껴 봐)

한 인물이 두 시대를 넘나 든다. 한 명의 배우가 두 개의 전장에 선다. 윌리엄 월리스로서 13세기 스코틀랜드의 진창을 누비고, 벤자민 마틴으로서 18세기 미국 남부의 숲과 강을 뛰어다닌다.

이 두 영화는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를 넘어서, 내란이라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극한 상황 속에서 ‘자유’와 ‘폭력’, ‘국가’와 ‘개인’의 경계가 어떻게 그려지고 왜곡되는지를 보여 준다.


'브레이브하트'는 민중 반란을 다룬다. 이 영화는 중세 봉건질서 속에서도 피어나는 민중의 저항정신을 포착했다. 잉글랜드 왕권의 폭정에 맞서는 스코틀랜드인의 피 끓는 외침이 화면 가득하다.

여기서의 ‘내란’은 뻔한 권력 다툼이 아니다. 외세에 맞서는 민족 내부의 자각과 투쟁은 모든 역사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민족의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도, 왕족도 아니다. 그가 들고 일어선 이유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복수는 이내 민족 해방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낸다.

영화의 마지막, 그가 단두대에서 외치는 "Freedom!"은 고문과 죽음을 초월한 민족 해방의 상징이 된다.

이 순간, 자유란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인간 존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부의 귀족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을 배반하고, 월리스의 이상은 종종 현실 정치의 벽에 침몰한다. 자유란 누가 말할 자격이 있으며, 누가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


'패트리어트'도 미국 독립전쟁이라는 웅대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스토리를 중심에 둔다.

벤자민 마틴은 과거에는 잔혹한 전사였지만, 지금은 전쟁의 상흔을 떨치고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원했던 평범한 가장이다. 그러나 아들이 무고하게 살해당하고 다시 무기를 든다. 자유는 이곳에서도 구호가 되지만, 그 동기는 가족의 복수라는 보다 본능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에서의 ‘내란’은 근대적 의미의 독립전쟁이다. 식민지 백성들이 제국의 중심에 맞서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려는 투쟁이다. 그러나 영화는 민병대의 활약과 함께, 농민과 노예, 여성과 아이들까지 전쟁의 일부로 끌어들이며, 공동체 전체가 이 거대한 싸움에 어떻게 휩쓸리는 지를 보여준다. 국가를 위한 싸움이 결국 개인의 피로 얼룩져 가는 장면들에서, 관객은 묻는다. 독립이 과연 모두를 위한 것이었는가.

'패트리어트'는 '브레이브하트'처럼 집단적 순교나 영웅적 죽음의 로망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의 잔혹함과 희생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한 고독한 결단들이 모여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세운다는 점에서 미국 건국의 정당성을 찾는다. 결국 이 영화는 내란을 통해 식민지 민중이 ‘국민’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란이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이는 단지 역사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원칙의 문제다. 정당한 내란은 공공선을 향해 있으며, 그 수단이 민주적 질서를 재건하거나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반면, 특정 계층의 권력욕이나 사적 이익을 위해 민중을 동원하거나, 오히려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내란은 그 수단과 목적 모두에서 부도덕하다. 예를 들어, '나치의 뮌헨 폭동(1923)'이나 쿠 클럭스 클랜의 민병대 활동은 표면상 '정권 타도'를 외쳤으나, 그 본질은 차별과 폭력의 확산이었고, 민주주의의 파괴였다.

반대로,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의도가 공공선을 지향했던 내란의 사례로는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노예들이 ‘인간으로 살고자’ 들고일어났다는 점에서, 역사상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자유의 외침으로 읽을 수 있다.


내란을 도덕적 기준으로 분류해 본다.

(그냥 해 보는 거다. 재미로... 요즘 내란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
첫째, 정당한 내란은 명백히 억압된 다수의 권리를 회복하고 민주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운동이다. 한국의 촛불항쟁이나 1989년 동유럽 민주화 물결은 이러한 예로 볼 수 있다.
둘째, 부도덕한 내란은 기득권의 이익, 인종적·계급적 지배 강화를 위한 폭력으로서, 목적도 수단도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미친놈의 비상계엄 같은 거?
그리고 셋째, ‘불완전한 정의’로 싸운 내란이 존재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처럼 윤리적 동기는 정당하지만 실행 전략과 공동체적 전망이 결여된 저항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참회와 교육의 대상이자, 오늘날 자유의 조건을 재성찰하는 거울이 된다.


'브레이브하트'와 '패트리어트'는 각각 자유의 신화와 자유의 현실, 집단적 희생과 개인적 결단, 민중 봉기와 국민 혁명이라는 서로 다른 문법으로 내란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결국 자유는 스스로 피를 흘린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낭만적이면서도 불편한 진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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