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환자 생존기] 달리고 청소하고 산책가고
이제는 조울증 환자 생존기가 되었다. 확연히 항우울제를 먹던 시기보다 조울증 약을 먹으면서 안정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탄산리듐정 150mg과 아리피졸정 1mg을 먹었는데, 한 달사이에 살이 5~6kg이 쪘다. 계속 뭘 먹어서다. 아리피졸정 1mg은 초등생부터 노인까지 범용으로 쓰는 약으로 최소량이었음에도, 식욕증가라는 극히 낮은 수치의 부작용이 작용한 거라고 의사는 판단했다. 어떤 약에는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떤 약에는 아예 반응하지 않는 나 때문에 의사가 5년간 계속 당황하고 있다. 어쨌든 그래서 아리피졸정 1mg을 제외하고 탄산리듐정 300mg으로 용량을 늘렸다. 약 먹는 시간도 아침에서 저녁으로 옮겼다. 운전할 때 졸린 이유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가 아니라 약 때문이라는 걸 20여일이 지나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면제들과 함께 색색가지 약을 밤에 털어넣고 있다.
그간 불같이 짜증을 내는 일도 있었다. 몸이 피곤한데다, 복용시간을 바꾸면서 약을 제 때 챙겨먹지 못한 시기에 진짜 불같이 짜증이 올라왔다. 평소에는 '좀 거슬리네' 또는 '좀 불편한데?' 싶었던 일에 짜증이 튀어올라 산만해졌다. 성격이 변했다 싶을 정도였다. 신발이 불편하다거나, 남편이 건네는 말투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으면서도 올라오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런 일들이 있은 며칠 후 병원과 상담이 잡혀있어서 약도 조절하고, 상담도 짜증이 나는 원인 중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후속 상담을 계획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일주일에 2-3번 달리기를 했다.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날에는 스텝퍼를 하고, 또는 인근 둘레길을 2시간씩 걷기도 했다. 몸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건 꽤 오랜만인데 할만 했고, 골짜기로 파고 들거나 화산구름처럼 떠오르는 마음을 흩어놓는데 도움이 되었다. 달리기를 하면 종아리 아래가 무척 아픈데, 어느정도 거리가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걸 안 이후에는 참고 달린다. 4km 내외를 달리는데 속도는 9분정도다. 무릎도 안 좋고, 평소 움직이지 않던 나로서는 꽤나 좋은 기록이다. 슬로우 러닝은 빠른 러닝보다 근육도 더 생긴다고 하니 일석이조다. 러닝이 끝나면 계단으로 집에 올라오는데 이때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이 꽤 아픈게 기분이 좋기도 하다.
매일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도 수시로 마음이 무겁고, 지칠 때가 있다. 어려움에 처한 일 때문에 사람들과 통화를 한다거나 하면, 역시나 그 여파가 꽤나 오래 간다. 달리기를 나가는 건 버겁고 지칠때는 화장실 청소같은 집안 일을 한다. 일단 락스를 무한히 뿌려놓고, 잠깐 눈을 붙인 다음 (락스를 뿌려놨으니 어쩔 수 없이) 청소를 한다. 그렇게 몸을 쓰고 나면 이전에 쌓여가던 감정들이 흩어져버린다.
더운 여름날에는 아침에 사랑이 산책을 했는데, 요즘처럼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날에는 남편을 기다렸다가 같이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예전에는 산책을 나가는 것도 있는 힘을 다해서 겨우겨우 나갔고, 나가서도, 다녀와서도 감정의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울증이 있을 수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모든 것이 힘들고 지치는데, 어렵게 나가서 헐떡거리며 산책을 하고 들어와서도 다시 먹구름 안에 갇히는 일의 반복에 무엇이 나아진다는 것인지 회의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내 우울이 깊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울의 바다에 산책이라는 잉크 한 방울로는 기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몸을 움직이자는 생각이 먼저 드는 단계에 진입한 걸로 보인다.
그 동안 생각나는 걸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을 했다. 하다가 중간에 관두더라도. 눈 앞에 휴지조각 하나를 버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바로 손을 뻗는 연습을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런 연습이 하나씩 쌓이면서 동력이 생긴 것 같다.
며칠 전 여에스더 박사 남편이 올린 페이스북 글을 봤다. 부인과 연락이 잘 안 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와의 약속도 3시간 전에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면서 취소한다고. 회사 대표의 역할을 한번 하고 나면 일주일을 집에서 잠옷입고 누워만 있다고. 이해해 달라고. 너무 이해한다. 나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사람들과 약속을 거의 잡지도 않았지만, 간헐적인 약속도 취소하기 일쑤였다.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증 우울증으로 물리적인 뇌 치료를 받고는 죽고싶은 생각은 안 든다며 이만큼이라도 만족한다고 했었는데, 이후로도 우울증으로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내 모습이랑 겹쳐서 많이 안쓰럽고, 안타깝고, 여러 마음이 들었다.
완전한 극복은 없는 병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잘 보내려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삼십분만 더, 십분만 더 살아보자고 매 순간 모래성을 쌓아올리는 병이다. 그래도 몸을 움직여서 마음을 흩어놓을 정도의 회복을 한 것에 감사하다. 이것만 해도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요즘 나는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며, 그저 오늘을 산다는 생각으로 지낸다. 아주 단순하게. 요즘은 숨을 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