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환자 생존기] 세밀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어제 '몸을 움직여서 정신을 흩트리자'며 가열차게 말했지만, 어제 진행중인 어떤 일로 인해 여러 사람과 통화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마치 내가 풍선이 되어서 서서히 바람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온 몸의 기운이 빠졌다. 낮잠을 두번이나 자고, 그 사이 좀 울기도 했다. 남편은 퇴근하고 담박에 나의 변화를 알아챘다. 그리고 오늘 어제의 컨디션 기록에 '아직 외부 자극에 많이 취약함'이라고 적어두었다.
인스타에서 '과민감성의 고통', '과각성', '트라우마' 등으로 한 사람의 예민함을 설명하는 릴스를 보았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에, 말 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리기 때문에 불안이 많고, 불안이 많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고, 일이 잘못되는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자책하는. 세밀하게 느끼는 사람들, 단순히 예민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일 뿐, 그런 나도 안전함을 느끼고 누릴 자격이 있다는 릴스였다. 10년 전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도 몇 번의 상담과 치료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어떤 이가 설명하기로는 실제로 감각뉴런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일 수록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 하다.
사람들의 어투에 엄청 영향을 받고,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변화에도 물에 잉크가 번지듯 감정과 생각이 요동치고, 카톡 문자 공백에서도 감정을 느껴버리는 내가 나도 꽤 피곤하다. 이런 나랑 사는 남편도 내가 버거울 때가 있을 거다. 가라않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가볍게, 사뿐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러기에는 세상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말을 하고, 표정을 짓고, 제스쳐를 하며, 아우라를 내뿜고, 온라인에서도 나에게만 보이는 말투와 표정을 짓는다. 머리가 알아채기 전에 감각이 먼저 반응하므로, 내가 의지로 영향과 자극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는 발목이 늪에 빠져버린 상태이기 일쑤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자극을 최대한 덜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데, 하나는 외부 자극의 수 자체를 줄이는 거고, 하나는 감각이 무뎌지게 훈련하는 거다.
외부 자극의 수를 줄이는 건, 최소의 사회생활을 하는 거다. 일뿐 아니라 교우관계,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어제처럼 힘든 날, 그리고 그 여파가 이어지는 오늘 같은 날에는 엄마집에도 가지 않는다. 언니가 여행에서 돌아온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부러 가지 않았다. 가서 이야기를 나눌 마음의 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그럴 수는 없는게 일상이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과 만남 중간 혹은 끝에 마음을 쉴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넣는다. 그렇게 화, 수, 목 저녁 일정이 매번 있고, 하루종일 늘어져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모임을 하고 오면, 조금 힘이 난다. 미사도 그런 의미에서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그런데, 몇 가지 모임에는 돈이 든다. 그게 또 어쩐지 지금 내 상황에서 바보같은 짓인가 싶기도 한데, 남편은 필요한 거니까 계속 하라고 한다. 늘 미안하다.
감각이 무뎌지게 훈련하는 건,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명상이 신경계를 안정화시키는게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하니, 믿고 해보는 것 뿐이다. 감각이 무뎌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약간 완화시키는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상담을 통해서 감각하는 나를 인지하는 메타인지 감각을 기르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적어도 글을 쓰려면 차분하게 머리 속이 정리가 되어야 하니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바보같은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특히 돈 문제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바보같다. 죄의 목록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항목이 줄을 잇는다. 그 속에서 살아내야 한다. 바보같고, 죄 많은 나를 인정하고 끌어안으면서 살아내야 한다. 그걸 몰랐다. 인생이 리셋되는 운영체제인 줄 알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나에게 최종적인 안전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러니 매몰되지 말고, 놓아버리지 말고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