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환자 생존기] 내 세상만 슬로우, 슬로우
그러니까 지난주 월요일부터 카메라 셔터가 눌러진 것처럼 '찰칵!' 하고 울증이 시작되었다. 감정이 폭주하여 울다가, 죽다가, 저주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느려졌다. 당황스러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행동이 현저히 느려졌다. 나한테만 슬로우가 걸린 것처럼 느적느적 움직였다. 겨우 움직였다. 잠을 많이 잤다. 새벽 4~6시 사이에 일어나던 나는 사라지고 8시, 9시, 10시에 일어나고, 하루하루 해야할 최소한의 일만 하고 하루종일 잤다. 잠이 쏟아진 것도 같고, 뭘 하려다가도 뭘 하려는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서 잔 것도 같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내 세상만 슬로우, 슬로우. 회의에 참여하거나 남편과 있을 때, 독서모임에 참여할 때는 겨우겨우 템포를 맞춰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꽤 오래전, 그 때는 동네 가정의학과에서 자율신경계 장애 진단을 받고 신경안정제와 항우울제를 먹기 직전 시절에 같이 일하던 교수님이 내가 정리하던 서류를 가로채며 "지금 새벽 3시야. 그러니까 제발 빨리 움직이면 안 될까?" 했다. 나는 "교수님. 저도 최선을 다해서 움직이고 있는 거에요"라고 항변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때도 슬랩스틱처럼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나를 내가 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움직여지지 않았던 걸 기억한다.
생각도 느려진다. 카메라 셔터스피드를 느리게 하고 찍는 조명그림처럼 생각도 몸도 궤적을 남기면서 움직인다. 울증은 왜 갑자기 왔을까. 텐션의 변화를 일으킨 건 뭘까. 며칠 보리차가 없어서 홍차로 물을 끓여마시면서 카페인이 자극이 되어서 뇌신호에 변화를 일으킨걸까? 생리주기 때문에 호르몬 영향을 받은 걸까?
일주일 넘게 엄마집에도 안 갔고, 언니 오빠들 채팅방에도 최소한의 응답만 했다. 다른 종류의 카톡도 미친듯이 울리는데 아무것도 열어보지 않고, 알람을 끄는 것조차 하지 않아서 핸드폰은 하루종일 저 혼자 울어댄다. 사랑이 약과 내 약만 겨우 챙기고, 하루 한 두끼의 끼니, 사랑이 배변 산책만 겨우겨우 하고 있다. 회사에 다녔다면 또 매일 결근을 알리고, 죄책감에 찌들어 살았을텐데 그나마 그 과정이 없어서 다행이다.
식물들 물도 챙겨줘야 하는데, 그것도 미루다 미루다 겨우 챙겨줬다. 화분갈이를 해줘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일단 지금상태에서 말라죽지 않게 다시 물을 준다. 몇 가지를 빼고 수경재배를 주로 하기로 한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며칠에 걸쳐서 조울증 환자의 책을 읽었다. 1형 양극성장애에 속하는 저자는 조증이 오는 시기를 몇 년 단위로 겪었다고 했다. 나랑은 양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도움은 되었다. 그래도 저자는 회사를 계속 다녔다.
일을 많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조증과 울증이 변검처럼 휘날리는 나를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에, 일의 텐션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가을이 왔고, 몸은 바람이 불때마다 얼음조각이 뼈에 붙는 것처럼 추위를 느끼기에 옆 사람은 여전히 땀을 흘리며 여름 블라우스를 나풀거리는데 나만 초겨울 니트를 꽁꽁 싸매고 있다. 여름과 가을 화사하고 풍족한 햇살이 있는 동안은 그래도 좋았는데, 비가 내리고 찬 바람이 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계절 울증의 기운이 필터처럼 붙어서 공기, 공기마다 데자뷰를 만들어낸다.
달리기도, 계단 오르기도, 30분 쓰기도, 기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남편과 같이 쓰는 컨디션 일기만 겨우 남기고 있다. 이 느린 세상도 흘러가기는 한다. 사구를 만나 유속이 현저히 느려졌지만 그래도 흘러는 간다. 쓰다만 글에 그냥 흘러가는대로 모든 것을 맡기자고 했으니, 맡기는 수 밖에. 나만 느려져서 앞, 뒤, 양옆 어디를 봐도 어지럼증이 일지만 그래도 그냥 그런 채로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왜 나만 이럴까? 유전인가? 환경인가? 나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치고 올라오지만 이내 모래성처럼 사라지고 멍해진다. 그래도 이 시간을 지나가야 한다.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