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의 화산섬이 되어..

[조울증 환자 생존기] 우울에 끌려내려가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자각

by 강마

그러니까.. 꽤 여러번 글을 쓰려고 시도했다가 마무리를 못 짓고 저장만 해왔다. 지난 번에 깨달은 '우울이 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울도 나의 일부이며, 그런 이유로 다른 모든 것처럼 우울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소화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저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존재자체로 경험한 이번 깨달음을 내 몸과 정신과 마음 구석구석으로 흘려보내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 한 달 주기로 가는 정신과 정기진료와 상담치료를 다녀왔다. 정신과 선생님은 지난 7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나에게 일어난 경제적인 사건들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알게 되자 "그렇다면 의문이 풀린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복은 있었지만, 좋아지던 상황이 악화된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극단적인 우울에서 벗어난 것이 장하지만, 여기서 더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고 즐거워지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 그건 지금 당신의 상황에서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지금이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다."라고 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는 말로 들렸다.


상담치료에서는 정신과 진료 이야기, 그 사이 극단적 우울증에서 벗어나 그냥저냥한 일상을 보내는 이야기,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길 잃은 경제활동과 직업적 소명에 대한 혼란한 마음, 어려운 와중에 지키고 있는 루틴들, 신앙생활의 영향,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 나의 장점에 대한 타인들의 위로와 그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번에 깨달은 우울과 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담사는 결혼 전인 10여년 전부터 시작해, 내가 이 병으로 인해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그러나 그걸 극복하고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이야기, 결혼하고도 배우자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죽음 충동들, 그러나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나의 우려와 달리 남편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지원과 지지, 그렇게 최악의 경계를 매번 갱신하다가 결국 회복해온 과정에 대해서 리뷰해주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좋아지고 있는 과정이며, 이제 우울에 빠져도 헤어나올 수 있다는 자각과 감각이 생긴 것 같다고도 했다.


10년.. 숫자로는 참 짧은데, 기억은 까마득히 멀다. 처음 상담의뢰를 위해 전화 걸던 오후의 내 모습, 처음 상담 가던 날에 떠있던 쌍무지개, 매주 상담 받던 시절의 나와 상담실의 색감은 뚜렷하다. 그리고 이후의 10년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5년 후 즈음에서 상태가 처음만큼이나 악화되어 다시 찾고, 남편에게 응급상황을 알리고, 투약을 권하던 것, 그리고 남편에게 그런 상황을 알리게 되어 꺼이꺼이 울던 기억은 있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뭘 하고 싶다거나 막 흥미가 돋는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운동을 하고 햇빛에 거침없이 나갈정도로 에너지가 회복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잘 지내고 있다. 오전에 거실에 드는 햇빛을 따라 앞산이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름을 알아챌 정도로 아주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는 걸 지켜보는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폭풍같은 10년이었다. 그 10년 이전부터 꿈틀대던 우울이 폭발하여 분화구를 만든 이후로 사화산이 된 줄 알았던 우울은 조울의 활화산이 되어 내 삶에 자리잡았다. 마그마처럼 조울이 내 안에 일렁이고, 가끔은 분출하겠지만 여느 자연처럼 나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삶의 균형을 찾겠지. 가끔 연기도 솟고, 유황냄새가 주위를 맴돌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으로 계속 살아가겠지.


이 생존기를 언제까지 쓰게 될까.. 궁금했다. 150편이 넘는 글을 정리하기 위해 브런치 북으로 묶어보면서, 이 생존기에 끝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서 작은 쉼표를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가고, 아침 저녁 조울증약과 항우울제, 수면제를 먹고, 상담을 가고, 남편과 컨디션 일기를 쓰고, 가끔 일을 하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삶은 계속될거다.


우울과 조울이 사라지는 대신 내 안에 제대로 자리 잡으면서 그 10년의 대장정이 쉼표를 찍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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