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환자 생존기] 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하여
몸이 무슨 고장이 난 건지 헤르페스로 의심되는 증상이 다리에 나타나고, 온 몸이 간지럽기 시작해서 결국 스테로이드 주사까지 맞고, 항히스타민제까지 먹으며 며칠을 약에 적응하느라 힘들게 보냈다. 난데없이 전신 근육통이 찾아와서 괴롭히더니, 돌이켜보면 2개월 전부터 드릉드릉하던 피부문제가 한계치를 뚫고 튀어나갔다. 손 앞 뒤로 난 간지러움은 작은 사마귀같은 수포들로 차올랐고, 엄청 심하던 손가락 두 개는 관절염이 온 것처럼 아프다.
크리스마스 전에 올해 프로젝트가 끝났고, 가벼운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냈는데 그날 밤 새벽부터 두려움과 공포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이 망해간다고 난리인데, 나는 직장도 없고 이렇다할 재주도 없고 몸은 엉망이고 그냥 쉬고만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한편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이 무지함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프로젝트 끝나고 2주 간을 그냥 좀 편하게 쉬어도 될 것을 두려움에 떨면서 보낸 셈이다.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할 것 같은데, 그래서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상태로. 상담선생님을 한달만에 만났는데, 수면, 식사, 운동 중 하나도 건강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안 좋을 수 밖에 없다면서 유산균, 오메가쓰리도 챙겨먹고, 무조건 밤에는 자고, 하루 한끼라도 제대로 챙겨먹고, 조금의 운동이라도 하라고 했다.
오늘에서야 약도 좀 적응이 되고, 몸상태도 괜찮아져서 밥도 챙겨먹고 (남편이 무조건 한끼는 챙겨먹어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해서), 집안일도 조금 하고, 책도 봤다. 인류학서적을 읽고 있는데, 마침 온라인 세미나가 있어서 신청했다. 다들 박사님들이라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책을 그냥 읽는게 아니라 진짜 공부한다는 태도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것이든 내가 읽고 보고 쓴 것들이 내 안에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했고,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 잠재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20년도 더 전이긴 하지만 수능 수학 상위 1%였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근의 공식이고 뭐고 당췌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부터, 진짜 영어는 요즘 유치원생보다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는 것,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없다는 걸 매번 확인하다보니 정말 내 안에 뭔가 있기는 한 걸까? 싶다. 지난 수십년간 읽고 듣고 보아온 것들이 어떤 식으로 내게 남았을까?
내가 삶과 사회, 사람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남았겠지. 읽고, 보고, 생각한대로 살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식의 '이야기'들이 정확한 '정보'나 '지식'이 되지 못하고 뭉뚱그려지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느껴진다.
뭐든 일을 하고, 뭐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를 가지고 읽고, 기억하고, 쓰고, 생각하는 활동을 더 많이 해야겠다. 주의집중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뭔가 뜻을 가지고 하고 싶은 걸 하는 자아를 참 오랜시간 방치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 있는 것들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자아의 이야기를 들어야, 다시 뾰족한 내가 나올 것 같다.
내 안에 근의 공식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공부하고 생각하고 일하는 방식은 남아있을테니까. 그걸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