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쉬어야 하나
[우울증 환자 생존기] 내 삶의 새로운 기준
의사 선생님은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오래 쉴 수 있으면 오래 쉬라고 강권했다. 프로젝트가 있는 날만 나가고 약 4주 정도 쉬고 있다. 쉬면서 죄책감 같은 거 가지지 말고 편하게 좋아하는 걸 다시 찾아가면서 푹 쉬라고 했다. 쉬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고 어색했는데 이제 좀 안정을 찾고, 쉬는게 편안해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런 안정감과 편안함이 내 인생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어줄 것 같다는. 이래서 오래 쉬라고 했나보다.
언제 쉬었더라. 회사에 다닌지 12년차, 그 동안 휴가로 해외도 다녀오고 했지만, 휴가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일을 하고, 미국 친구 집에서 이틀을 꼬박 자기도 했다. 그래봤자 열흘. 다녀오면 다시 챗바퀴. 이렇게 푹 쉬는 건 처음인 기분이다. 올 겨울은 통으로 쉬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면 회사를 그만둬야지 마음 먹었다. 나를 홀대하고 깎아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회사에 나 말고도 아픈 사람이 많다. 이제 다들 나이가 들어서 암환자도 있고, 나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들도 있고. 돌아가신 분도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내가 이렇게 병가를 쓰고 있는게 맞나? 라는 생각을 처음엔 했었다. 하지만 그 기준을 외부에 둘 필요가 없다. 내가 아픈데 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덜 아프고 더 아픈지 비교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나? 세상에 나는 하나뿐이고, 이런 하나 뿐인 나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 상관도 없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나를 틀에 맞추려고 하나? 맞지 않는 틀에 맞추려면 틀을 바꾸거나 나를 도려내고 다듬어야 하는데 후자는 할 만큼 하지 않았나? 45년 동안 살면서 충분히 시도해보지 않았나? 이제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맞는 틀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나?
유입 검색어에 종종 '우울증 휴직'이 뜬다. 나처럼 아파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거다. 그 단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얼마나 힘들면 그런 검색어를 넣어보는 걸까. 그냥 저질러 보라고 하고 싶다.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나를 챙겨줄 수가 없다. 나를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들도 내가 마음을 먹고 저지르지 않으면 뭘 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행동해야 한다.
쉬어보니 '이런 삶도 있구나' 싶다. 처음 투약을 했을 때가 생각난다. 약을 먹고 난 후에 '사람들은 이런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건가?' 싶어 충격 받았었다. 난 그렇게 항상 긴장된 상태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겪어보는 안정감, 그 강렬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긴장하지 않고 산다는 건 어떤 것인지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뇌가 적응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리고 있다. 아직도 항우울, 공황장애, 범불안장애 약을 먹고, 불안, 긴장, 수면장애 치료제를 먹고 있다. 환각과 망상을 감소시키며 정신활동의 흥분상태를 제거한다는 사회 적응 보조 약품과 조증삽화를 안정시켜주는 약을 먹고 있다. 3년, 4년동안 약을 스무번은 바꾼 것 같다. 이렇게 맞는 약을 찾기 어려운 경우는 흔치 않다며 의사 선생님은 미안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와 돌아보니 나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중간에 단약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건 다 나았다고 착각했었기 때문이니까)
다이어트가 어려운 것도 몸이 기억하는 나의 '기준점'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우울증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이제 조울로 접어들기까지 했으니 그 기준점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것이지만, 이 불안과 긴장을 확 낮춰주고 그 기준점을 바꿔주는 계기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쉬어가는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다.
더 이상 쉬는 나에게 재촉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해야한다고 채근하지 않고, 편하게 오늘을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그 동안 열심히 산 나 자신을 보듬어 주면서. 그래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