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아직 안정기는 아닙니다
오늘은 급하게 출근하느라고 아침약을 못 챙겨갔다. 점심약도. 오후에 출장이 있었는데, 다시금 팔목을 긋는 감각이 찾아왔다. 약 두번 건너뛰었다고 열흘 가까이 좋아지던 컨디션이 다시 떨어졌다. 회의에 집중도 못하겠어서 급하게 필요시 약을 먹었다. 아직 안정기가 아닌 거다. 몇 년을 떠돌던 감각이 그렇게 한 순간에 좋아질리가 없지.
나는 현재 아침과 점심때 마파마록세틴정 10mg 0.5와 명인부스피론염산염정 10mg 2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유투브에서는 정신과약 장기복용 부작용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빨리 죽는다, 평생 복용해야 한다, 금단 증상이 있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고, 해당 부작용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평생 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먹고 있다. 손목을 긋는 느낌을 달고는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이다.
어제는 상담을 받았다. 내면 가족 치료를 통해 내가 끝 간데까지 가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이어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는 건 다음 단계로 전환하는 계기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이기도 하다 했다. 남편을 만나기 직전처럼 이번에도 잘 넘기면, 남편을 만난 것만큼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힘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고 싶어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싶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나를 잘 돌봐서 남편과 사랑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남편이 생각하는 행복인, 무탈한 삶을 살고 싶다.
어쩌면 영원한 안정기는 없을 거다. 평생 관리하면서 살아야 할 거다. 평생 약을 먹고, 평생 운동하고, 평생 일기를 쓰면서 살아야 할 거다. 그래도 그렇게 무탈하게 살 수 있다면 좋다. 내일까지 나가면 내년 2월까지는 회사를 쉬게 된다. 잘 버티고 있다. 이제 하루만 더 나가면 된다. 오늘 약을 잠시 놓쳤을 뿐인데 자극에 이렇게 쉽게 반응한다는 걸 알았으니 약을 더 잘 챙기고,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어제는 대림 3주차 시작 미사였고,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말씀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무소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보에 실렸다. 가진 것을 버리고 비워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한 때, 무척 많은 것들을 정리했다. 살림살이, 옷, 구두, 책 등의 갖은 물건은 물론이고, 일기, 편지, 카드, 사진도 많이 버렸다. 절정은 결혼 후 1년이었다. 그렇게 버리고 정리하면서 많은 것들이 가벼워졌고 좋았다. 한창 비워내고 나니 무엇을 더 버릴 것이 없었다. 요즘은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을 읽으며 정리하려고 책장을 파기 시작했다.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내어놓고, 새로운 것이 내 마음과 정신을 채울 수 있도록 더 비워내고 싶다.
몇 주만에 돌아온 감각이 나를 깨웠다. 아직 괜찮지 않다고. 방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진하라고.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날이 추워서인지 자동차 밧데리가 방전되었다. 충분히 달리지 않아서 잠깐의 방심이 방전을 불렀다. 지금의 나도 똑같은 것 같다. 밧데리 충전을 위해서 더 성실하게 달려야 할 때이다. 회사를 쉰다는 것, 아무일도 하지 않는 건, 12년 만이다. 이 시간을 감사하게 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매일 조금씩 새로 태어나면서 달라진 삶의 궤적을 그리고 싶다.
여전히 괜찮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고, 이렇게 자각증상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