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번아웃이에요
내일부터 2월까지 병가를 냈다. 올 겨울은 모든 걸 잊고 쉴 예정이다.
정신과 선생님이 말했다. "번아웃이에요. 번아웃이 와도 애저녁에 왔는데 너무 오래 방치했어요. 그래서 더 힘든거에요. 열심히 살았잖아요. 그러면 쉬어야죠. 좋아하는 것도 다시 해보고." 번아웃. 주변에서 가끔 내게 말했었지. 하지만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열심히 산 것 같지만,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늘 게으르고 늘 아팠으므로. 내가 번아웃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냥 아픈거라고. 타고 나기를 우울증에 약하게 태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스스로 만족하는 프로젝트를 해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원하는 만큼 일하지 못했고, 늘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해서 나는 일을 하지 않은 몇 년을 보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모든 직원이 동원되는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회사 일, 이 분야의 일에 점점 무관심해져 갔다. 20년을 일했는데 이룬 것도 없고, 이 분야는 계속 같은 논의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지쳤다.
우연히 유투브를 봤다. 진짜 번아웃과 가짜 번아웃을 구분해준다는 정신과 의사의 유투브다. 번아웃이 정확하게 뭔지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스스로 번아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 의사가 말하는 번아웃의 조건 6개가 다 맞아떨어졌다. 몇 년에 걸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나를 나는 알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왜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스스로 다그치고 있었다.
한 때 1년에 17개의 프로젝트를 돌리던 때가 있었다. 일이 좋았고, 조직 내에서는 괴로웠지만 그 괴로움을 보상 받을만큼 일이 보람있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그런 극한 상황을 몇 년 지내고 번아웃이 찾아들기 시작했는데,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왜 예전만큼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투쟁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몇 년을 다시 흘려보냈다. 우울증이 조울증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괴롭혀왔던 거다.
내가 한갖지게 일했다고 생각하는 기간에도 나는 성실히 내 업무를 수행했다. 늘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냈지만, 돌아오는 피드백은 흡족치 않았고 스스로의 기준도 너무 높았다. 회사에서 주지 않는 휴식과 보상, 지지를 스스로에게, 회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고 달래줬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친거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참 바보같다.
무작정 끝간데까지 열심히 하는 걸 나는 이제 반대한다. 성실한 것과 바보처럼 열심히 사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열정으로 투쟁하며 쟁취하는 성과를 나는 더이상 추구할 수 없을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 축나는 걸 알면서도, 매번 이렇게 극한까지 몰아가며 한 숨 돌리는 인생을 더는 살 수 없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랬다. 5년여의 프리랜서 생활 끝에 지쳐 나가떨어져서 제주에서 한달을 무위도식하며 지내고 몇 달이 지나서야 취직을 했다. 그리고 또 매우 열심히 살았다. 프리랜서 생활 전에도 그랬다. 하루 16시간씩 창문도 없는 사무실에서 씨름하고, 외롭게 싸우며 3~4년을 살고 나가떨어졌다가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패턴이 이어져온 거다. 늘 마지막까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버티다가 나가떨어졌다가 쉬고 돌아와서 '열심히'의 역치를 갱신시키고, 번아웃이 오고, 나가떨어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모든 날이 처음 사는 인생이라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살 수가 있나 싶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이번에 쉬는 동안에는 어떤 변화를 만들지 모르겠다. 쉬고 돌아오기로 했는데, 돌아온 후를 그 누구도 장담할 수도 없다. 쉬고 난 다음에는 늘 급격한 변화가 있었는데, 내년 3월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지 모르겠다. 매일 성실하게 루틴을 만들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나에게 더 이상의 채찍질은 말아야겠다는 사실만 알겠다.
젊은이들에게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하고 싶다. 요즘 갓생이 유행이라는데,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고 싶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느니, 한 때라느니,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박완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젊음은 안 쓴다고 축적되는 것이 아니니 넘칠 때 맘껏 누려라. 아끼지 말아라'고. 나는 이 이야기를 갓생 사는데 갈아넣지는 말라고, 좀 여유롭게 젊음을 유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라고 하고 싶다.
휴가가 시작된다.
여유를 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