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고들빼기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나는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나 동료들이 식당에서 '이건 제대로 된 엄마 밥상이야' 하거나, '아! 우리 엄마식 된장국이나 김치찌개가 진짜 그립다'라며 입맛을 다시면 옆에서 짧게 웃는 표정으로 대응한다. 심지어 나는 엄마의 젖을 얻어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산골마을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기에, 이미 나보다 먼저 태어났던 7형제자매가 작은 체격의 어머니가 제공할 수 있는 젖을 이미 다 소진해 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당시 아버지는 내 이름을 바로 짓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내 이름은 '수캐'였다. 그냥 이름이 없으니 단순하게 부른 것이다. 다섯 살이 되어서야 집안에서 내 이름도 지어주고 호적에도 올리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젖도 못 먹는 상황이고 게다가 아주 약골로 태어나 '얘는 가망이 없다'라고 판단하신 게다. 그러니 나의 삶은 이미 절반 이상 성공한 거다. 어느새 중년까지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누나들과 형수님들의 밥을 먹고 자랐다. 누나들의 조그마한 등 위에서 옹알이를 시작했고, 형수님들의 부뚜막을 오가며 누룽지를 얻어먹었다. 누나들이 목욕시켜 학교에 보냈고 형수님들이 도시락을 싸줬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곧장 어머니는 8남매의 가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40년 동안 가장과 엄마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셔야 했으니 말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고향을 떠나 어린 누나들이 정착해 있던 도시로 전학을 갔다. 그때도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는 누나들의 음식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콩나물멸칫국, 어묵김치찌개. 미역국, 무채김치, 계란말이 등 누나들이 뚝딱뚝딱해 주는 음식들이 너무 맛있었고, 지금도 그런 음식들이 너무 좋다. 셋째 누나는 빠듯한 살림살이에서도 매일 시장이나 마켓에 들러야 했다.



큰형수, 작은 형수, 셋째 형수님들의 음식 솜씨가 정말 남달랐다. 이따금씩 고향에 가면 세 형수님들의 음식 페스티벌을 경험할 수 있었다. 큰형수님은 김치에서부터 빗살 뭇국까지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심지어 김을 구워 내놓아도 순식간에 계란 프라이를 해도 맛있었다. 작은 형수님은 손이 큰 편이라 양념이 듬뿍듬뿍 가미된 진한 맛이 일품이었다. 특히 고깃덩어리가 쫄깃한 지리산식 김치찌개는 언제나 공깃밥을 추가해야 했다. 셋째 형수님은 나물 요리의 대가였다. 그 집에서 식사를 하면 늘 베스트 퀄리티의 산채비빔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누나들과 형수님들의 케어에서 벗어나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최강의 극성이 되셨다. 어느 가을날, 고향 집 어색한 밥상머리에서 '고들빼기김치가 향이 독특하고 맛있다'라고 했더니, 그 이후 해마다 초가을이 되면 '고들빼기김치'를 담아주셨다.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 뒷들의 고들빼기들은 쓰지만 나를 평생 외롭지 않게 지켜주었다.



그 이듬해에는 외식하러 갔던 가든 식당에서 '더덕무침이 참 맛있다'라고 했더니, 해마다 동네의 약초꾼들에게 산 더덕을 부탁해서, 흐르는 물에 씻어서 하나씩 하나씩 일일이 껍질을 꺼낸 다음, 먹기 좋게 찢어서 양념장에 묻혀서 건네주셨다. 지리산의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한 산 더덕무침은 냉장고에 오래 두고 먹어도 그 식감이 생생하게 유지되었다.


또 어느 해는 '아들이 파김치를 잘 먹는다'라며 그 해부터 계절마다 고랭지 파김치를 해주셨다. 그것도 까기 힘든 작은 파만 골라서 버무린 뒤에 동그란 반찬통에 가득 담아주셨다.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해에는 인월장에 일부러 나가셔서, 싱싱한 파를 두 단이나 사서 그날 저녁 내내 다듬어 놓으셨다.



어느 여름엔 가는 평상에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머윗잎 향이 좋다'라고 하니, 저녁때 머윗잎을 데쳐서 내놓으셨다. 게다가 머윗잎이 연하고 맛있는 시기에 고향 집에 가지 못하는 해에는 라면박스에 하나 가득 먹기 좋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머윗잎들을 따서 보내주셨다.



어느 해 이른 봄에는 '두릅이 건강에 좋다'라는 얘기를 마을회관에서 들었다면서, 언덕배기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두릅들을 따다가 신문지에 싸서 택배로 보내주셨다. 아마도 그 두릅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서 그걸 딱 적당한 시기에 따기 위해 굽은 허리를 이끌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감시하러 다녔을 것이다.



어느 겨울에는 마당에 있는 대봉 감나무 홍시가 맛있다고 했더니, 해마다 몇 개를 따로 헛간의 잡동사니 장독에 담아두었다가 내가 가면 밤중에 살짝 꺼내다가 건네주셨다.



나는 비록 어머니의 젖을 먹진 못했지만, 그보다 몇 백배 진한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엄마 밥상은 기억에 없지만, 그보다 몇 천배 값진 평생건강밥상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젖보다, 어머니의 밥상보다 더 더 더 더 더한 고들빼기, 파김치, 무말랭이, 홍시, 곶감, 된장, 고추장, 깻잎장아찌, 콩잎장아찌, 고구마, 감자, 쌀, 찹쌀보다도 더 더 더 더 더한 사랑을 받아 내 몸과 영혼에 넘치도록 채워두었다.



그런 무조건적 감동이 이제는 끝났다. 어머니의 품에 갔다가 돌아오면 트렁크와 뒷좌석이 빼곡하게 농산물과 먹거리로 가득 찼다. 그래서 주차장에서 카트를 이용하여 집까지 옮겨야 했다. 지나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직장의 무의미한 스트레스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문 앞에 '지리산농협', 'OO 특산물'이라고 적힌 박스가 놓여 있으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니의 젖과 어머니의 밥상이 도착해 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택배 박스와 비슷한 물건만 보아도 꺼이꺼이 눈물을 훔쳐낸다. 이미 어머니의 젖이 말라버린 것을 인정하지만 그 사랑이 자꾸 그립고 또 그립기 때문이다. 쓴 고들빼기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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