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내 삶의 위기들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든 몇 번씩은 위기가 닥쳐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찾아오는 위기들에 대처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극복해야만 다음에 펼쳐지는 세상 속으로 진입할 수가 있다. 나에게도 몇 번의 크고 작은 위기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지원했던 대학에 떨어졌을 때였다. 입시분석가들이나 선생님들이 안정권으로 확신했고 스스로도 합격할 거라는 자신감에 충만했었건만 아쉽게도 떨어졌다. 큰 충격이었다. 낙방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도시의 저녁거리를 무조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계속해서 달리다가 산책로가 종료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길 옆으로 이어진 담벼락을 향해 수차례 주먹을 날렸다. 거칠게 상처 난 손등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재도전을 다짐했다.


두 번째는 직장 생활 1년 후쯤 갑자기 시작된 두통으로 인해 힘들어했던 시기였다. 고질적인 두통을 앓아본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원인을 알 수 없어 더욱 절망적인 두통 환자들이 많았다. 나도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두통은 외관상으로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나에게는 그 암흑 같은 세월이 20대 후반에 찾아왔다. 당시 두통으로 인한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시를 쓰기도 했다.



"첨에는/바늘촉/세우고/춤을추듯/사방을/찌르더니

다음엔/삼지창들고/가죽을/찔러제끼고/별안간

물컹물컹한/골을/비집고/이리누웠다/저리누웠다/한다.

...

"


신경과에 가서 다양한 종류의 정밀 사진을 찍어보았고, 경추가 원인일 거라고 하여 카이로프랙틱이라는 신종 도수치료도 받아보기도 했고, 침과 뜸 치료를 위해 한의원을 장기간 다녀보고 또 한약도 여러 한의원에서 지어다가 먹어보고, 대형 안과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고, 이비인후과에서 코의 구조적 이상 유무도 체크해 보고, 심지어는 턱관절 이상 때문인지 정밀검사를 해보고, 통증 클리닉에는 여러 의원을 수도 없이 다녀보고, 그리고 결국 신경정신과에도 다녔다. 더불어 접근 가능한 민간요법도 다 시도해 봤다. 급기야는 어떤 동물의 머리를 며칠 동안 푹 고아서 파우치로 만들어서 먹기도 했다.



특별히 두통이 심한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나의 컨디션으로 인한 감정 상태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겁이 났다. 그럴 때면 최대한 약속을 피했고, 꼭 만나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차라리 술을 마셨다.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술을 마시면 그 찝찝한 두통이 조금 덜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이슬비가 축축이 내리던 날이었다. 내 머리의 절반이 이미 내 몸이 아닌 듯한 기분 나쁜 고통에 빠져 있었다. 정말 표현하기도 힘든 그 두통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부슬부슬 아침부터 내린 비로 젖은 옥상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하늘을 향해 '나를 데려가든지..., 고통을 없애주든지..., 결정해 주세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두통은 약 3년간에 걸쳐 내 삶을 송두리째 휘젓고 다녔다. 연인과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회사에서도 영업파트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서핑 결과, '전형적인 VDT 증후군'이라는 의심도 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많은 의사들과 상담사들과의 대화는 모두 무의미했다. 그 무궁무진한 민간요법도 찾아보고 또 챙겨주는 사람의 마음일 뿐 효과는 없었다. 내가 의료계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두통의 원인과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 결과를 가져온 치료법을 말이다. 내가 두통을 이겨낸 결정적인 이유는 극한 운동이었다. 당시 회사 지하에 있던 스포츠센터에서 강도 높은 '스쿼시'를 거의 매일처럼 하면서 자연스럽게 두통이 없어진 것이다. 스쿼시 코트에 떨어진 땀방울 하나하나가 그리고 단 한순간도 정지해 있을 수 없는 순발력의 연속 동작들이 내 살과 피 속으로 점점 침투해오던 나쁜 세포들을 물리쳤던 것으로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위기는 '조직'에 대한 반기였다. 인간은 어차피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의 삶을 다른 사람의 전형적인 틀에 끼워 넣기 힘들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갑자기 '승진자' 명단에 나를 올렸다. 그에 따른 후속 절차들은 뻔히 예상되었다. 그 직급에 맞는 책임 있는 직책을 맡아야 하고 그 직급 이상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의 패턴이 갑작스럽게 180도 바뀌는 것이다. 평소 왕 노릇이나 혹은 대통령이거나 혹은 대표라면 잘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정권도 없이 위아래를 두루두루 신경 써야 하는 애매한 중간관리자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6개월간 휴직을 내기로 했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결단이었다. 그러나 어떤 예기치 않은 리스크에 맞닥뜨려졌을 때 고뇌와 타협보다 '정면돌파'가 해답일 때가 있다. 주변에서는 극구 만류했지만 앞뒤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큰 희생을 치렀지만 의도한 바는 성공했다. 잠재적 경쟁자들이 활용할 만한 '흠집'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생각했던 대로 경쟁자들은 "갑자기 휴직을 냈다면서요?" 혹은 "정말 어려운 결정을 했었네요. 집에 무슨 일 있었어요?"라며 비꼬듯이 얘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결단은 성공적이었지만, 황금 같은 휴직의 시간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애초에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6개월간의 휴직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내가 당시 휴직한 것에 대해서는 와이프와 아들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모른다.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었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 활용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후회가 된다. 다시는 40대 중반의 황금 같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6개월이 아니라 딱 한 달이라도 갖고 싶다. 그 자유와 평화와 사랑과 행복의 시간을 말이다.



그때의 휴직 기간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6개월 내내 일상의 범주와 마음의 허용 범위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생각보다 너무 좁았다. 내 일상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면 곧장 아련한 불안감들이 엄습했다. 아침에는 일상, 오전에는 불곡산, 낮에는 도서관, 저녁에는 또다시 일상 그리고 밤에는 지독한 독서에 갇혀 보냈다. 경비원들과 눈빛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고, 가급적 동네 마트에도 가지 않았다. 도서관 구내식당에서는 어떤 메뉴를 먹어도 같은 맛이 느껴졌다. 만약 다시 한 달이 주어진다면 그 첫날 아침에 제주도나 동해에 '한 달 살이' 셋방을 계약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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