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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장마와 우산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아직 유월임에도 한여름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 날 새벽에 올 장마는 시작되었다. 그 새벽비가 장마라는 것은 그동안 내 몸에 축적된 감각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50년 이상 경험했으니 말이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장마에 대비하는 가장 첫 번째 자세는 가족의 우산을 점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각 방마다 구석진 곳을 선정해서 물먹는 하마를 몇 마리씩 키워야 하고, 제습기와 건조기를 풀가동할 태세를 갖춰놔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쉽게 눅눅해지는 마음을 뽀송뽀송하게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나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출근길 자동차에서 주간 날씨를 캡처하여 가족톡에 보낸 후에 기어를 움직인다. 가족 간의 소통을 위한 작은 제스처이며 또 각자 일주일간의 계획과 동선에 1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솔직히 오늘날은 가족끼리 그런 정보를 주고받을 이유가 없다. 어느 스마트폰이든 홈 화면에 위젯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일주일을 무탈하고 즐겁게 보내라는 응원의 메시지일 뿐이다. 그렇게 장마가 시작된 날 아침, 긴 우산 2개, 2단 우산 2개 그리고 3단 우산 2개를 꺼내어 신발장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 출근했다.



장마는 특정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누구든 우산이나 우비가 필요하다. 우산은 참 흔하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잃어버리는 물건이 아마도 우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흔한 것은 음식점에 두고 오는 경우일 것이다. 혹은 대중교통수단에서 내릴 때에 놓고 오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다음은 다른 이의 차량이나 친구 집에 두고 오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산을 잃어버리는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왜일까? 우산이 마치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는 물건처럼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친척간에 친구 간에 그리고 동료 간에 얼마나 많은 우산이 바뀌어 위치하고 있을까? 그래서인지 우산에 대한 느낌은 참 인간적이다. '우산'이라고 발음하면 마치 친구를 발음할 때 느껴지는 기분과 비슷하다.



더불어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참 인간적이다. 초등학교 앞에서 우산을 들고 손주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 자체가 명화다. 또 아직 귀가하지 않은 가족을 위해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2개의 우산을 들고 서있는 아빠의 모습은 이 세상 어떤 풍경보다 듬직하다. 그리고 거리에서 어떤 긴급 복구 작업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우산을 받쳐주는 학생의 손길은 너무도 아름답다. 그 우산들이 비닐우산 이건 골프우산 이건 상관없다. 그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우산을 써본 기억들을 떠올려 보라. 기분 나쁜 기억이 있던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산을 함께 쓴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다는 마음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둘이서 함께 쓰는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의 반대쪽 어깨를 바라보라. 그 어깨 위에 인생의 참 맛이 톡톡 멋스럽게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산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장마에 내어 놓는다. 이 장마 시즌 중 나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친절한 낯선 이와의 우산 공유가 기다려진다. 유난히 길다는 올 장마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한두 번은 있었으면 좋겠다.



P.S.

우리가 장마철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 혹은 예상치 못한 홀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다. 장마에 꿉꿉해진 우리의 마음을 자주 챙겨 봐야 한다. 그래서 가까운 이가 혹은 업무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이 화창한 날에 비해 다소 예민해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매년 장마철을 통과할 때마다 한두 개의 우산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장마철마다 우리의 소중한 마음이 곰팡이 들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마가 길수록 마음의 문을 모두 활짝 열어 자주 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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