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우리가 일상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참 행복하다'라고 느낀 적이 얼마나 될까? 그것은 아마 그 음식의 가치와 공간의 특성 그리고 함께 하는 상대방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기억 속에 '행복한 메뉴'에 대한 경험들은 꽤 많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난 그런 점에서는 좀 특이한 것 같다. 그 기억들이 대부분 소박한 밥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리산의 벽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음식들에 익숙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식탁 위에 콩나물 김칫국이나 된장국 그리고 반찬으로는 무채 나물이나 깍두기가 차려진 밥상이 가장 좋다. 거기에 별식으로 계란 프라이나 계란말이가 추가되면 금상첨화다. 수도권에 거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값비싼 특별식'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질 않는다. 최근에 경험한 스시 오마카세, 소고기 오마카세, 호텔 뷔페, 고급 스테이크하우스 등은 가격은 내가 먹기에 부끄러울 만큼 높은데 대부분 '자극적인 맛' 일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는 부르지만 마음은 어딘듯 허전하다. 그 맛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누나들과 함께 중, 고교 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김, 콩나물, 두부, 어묵, 계란, 분홍 햄, 라면 등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식탁 위에 차려진 계란말이 혹은 무채 나물을 보고 눈물방울을 툭툭 흘리며 밥을 먹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더 많은 것이 그리고 또 더 좋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지만 그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계란말이에 목이 메고 또 쌀밥에 가슴이 하얗게 밝아지기도 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강남 한복판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빼곡한 고층 빌딩 숲의 한 중심부에서 만나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직장이 인근인 친구가 거침없이 자기네 회사의 지하 식당가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은 이미 샐러리맨들의 점심시간처럼 분주해 보였다. 친구에겐 너무나 익숙한 듯한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바라보니, '콩나물 김칫국 : 5천 원'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최근 직장인 평균 중식비용이 14,300원까지 올랐다는 이 고물가의 시대에 우리가 공통으로 갈구하던 메뉴가 단돈 5천 원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강남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반찬으로 올라온 것들이 계란말이와 무채 그리고 오이무침과 김이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최고의 만찬이었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계란말이에 열광할까? 아마도 그것은 모든 어머니들에게 공통으로 장착된 필수 메뉴이기 때문이 아닐까? 계란말이는 각 가정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약간씩 조리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그 크기도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모든 계란말이 중에 맛없는 계란말이가 없다. 누가 해도 맛있고 어떻게 해도 맛있다. 만약 계란말이가 번거롭다면 곧바로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인 '계란프라이'가 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계란 프라이를 좋아하면 식당의 한 코너에 '계란 프라이를 직접 만들어 먹는 코너'가 있을 지경이다. 그리고 모두가 줄을 서서 프라이를 만들어 먹는다.
어제 오후에는 이른 무더위 속에서 집안의 구조를 대폭적으로 바꾸고 나니, 시원한 것이 먹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와이프가 열무비빔밥을 해 먹자고 했다. 나는 끓이거나 볶거나 할 일이 없는 그 메뉴가 딱 좋았고 또 새로 산 열무김치를 맛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와이프가 '비빔밥엔 계란 프라이가 필수인데, 계란이 하나 남았다'라며 마트에 사러 간다고 나섰다. 난 완강하게 말리며 '그냥 열무비빔밥'이 더 좋다고 했다. 결국 식탁에 차려진 비빔밥 두 그릇에는 '계란프라이'가 절반씩 놓여 있었다. 와이프 말이 맞았다. '비빔밥에 계란프라이'는 하나의 법칙이었다.
내가 처음에 지리산 둘레길 인근에 땅을 매입하여 토목공사를 진행할 때만 해도, 그 천혜의 입지와 여러 환경적인 메리트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힐링센터'를 구상했었다. 그 힐링센터는 1. 혼자만 이용할 수 있었고 2. 스마트폰과 TV를 이용할 수 없고 3. 최소 3일 이상 이용해야 하고 4. 하루에 1페이지씩 백지에 쓰거나 그려야 하고 5. 식사는 간단하게 콩나물 김칫국과 계란말이 그리고 김치 1종류로 배식해 주는 콘셉트였다. 물론 아침, 점심, 저녁의 메뉴는 달라서 3개 SET로 구성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보고자 구상했던 가장 큰 이유는 계란말이와 콩나물 김칫국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곁에는 늘 함께해도 질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계란말이와 콩나물 김칫국은 물론이고 된장국과 미역국 그리고 두부조림과 무채 나물 혹은 배추김치와 깍두기는 우리의 식탁에서 늘 인기 있는 필수적인 메뉴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긴 인생에도 테이블 위의 필수 메뉴들처럼 영원히 질리지 않는 소중한 존재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 존재들은 늘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응원하고 기다려주고 채워준 것 같다. 계란말이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필수 메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또 누군가 나를 필수 메뉴로 생각하고 있다면 성심을 다해 '질리지 않도록' 할 것임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