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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받은 편지함과 메모장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동료나 선배에게 존경심을 갖기는 쉽지 않다. 대개 업무로 맺어진 관계는 함께 근무하는 동안에는 '아삼륙'으로 지내다가도 부서가 달라지거나 승진 등으로 인해 서로의 입장이 달라지면 남남이 되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의기투합하고 또 상황의 변화에 따라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완벽주의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분이다. 더불어 그의 본심을 알기 전에는 함께하기 쉽지 않은 독특한 희귀종이기도 하다.


내가 이 형을 만난 지가 벌써 12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때 인식된 완벽주의자 캐릭터는 최근 들어 더욱더 강해지고 고급스러워진 듯하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생활 루틴을 갖고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정도가 보통 사람의 눈에는 과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가 나와 같은 팀에서 함께 일한 기간도 4년이나 된다. 그러니 서로의 성격이나 취미 그리고 독특한 일상생활까지도 잘 알고 있다. 오늘 이 형과 나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직장 생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제 아침에 회의실에 가기 위해 형의 책상 옆을 지나가다가 슬그머니 그 형의 PC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웃룩의 받은 편지함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던 것이다. 정말 단 한 개의 이메일도 없이, 텅텅 비워져 있었다. '아! 여전하구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통상적으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받은 편지함은 거의 꽉 차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보통은 메일함 정리를 이렇게 성실하게 안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자가 주기적으로 클라우드로 옮겨주기 전에는 그대로 쌓여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편지함에는 아직 읽지 않은 편지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에 이른다. 이것이 보통의 직장인이다. 그런데 그의 받은 편지함은 늘 깨끗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다.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유형이다. 받은 편지함에 이메일이 누적되어 있는 상태를 여유롭게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둘이서 술자리를 할 때면, '비슷한 삶의 굴레'를 갖고 태어났다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좀 나은 편이다. 내 편지함에는 보통 다섯 개에서 열 개 정도의 이메일은 유지되기 때문이다. 아직 확실히 완료되지 않았거나 향후 누군가에게 공유해야 하는 이메일들은 하루 이틀 정도 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편지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깨끗하고 완벽하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업무량이 적거나 업무의 강도가 낮은 것도 아니다. 어떤 특정 사업이나 프로젝트에 꽂히면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여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성과도 매년 최고 레벨을 유지하는 베테랑 직원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정말 부지런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스스로 설정한 엄격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켜나갈 의지와 자세가 반드시 베이스에 깔려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껏 27년 동안 직장에 근무하면서 매일 8시 전에 출근해 왔다. 아침 일찍 스포츠센터에서 운동과 샤워를 한 후, 맑고 건강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찍 사무실에 도착하여 출입문을 여는 순간, 이미 불이 켜져 있는 밝은 사무실과 마주하게 된다. 나보다 먼저 출근하여 열심히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는 그 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록의 대상은 바로 '메모장'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다이어리앱이나 메모장앱이 아니라, 윈도우에 디폴트로 설치되어 있는 클래식 메모장 프로그램이다. 이 메모장을 활용하여 오늘의 할 일, 주간 업무계획 그리고 꼭 해야 할 일과 중요한 일정 등을 우선순위에 따라 꼬박꼬박 상세하게 기록한다. 줄을 바꿔서 기록하면 하루 일정만 해도 거의 한 페이지가 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메모들이 확인되거나 완료되면 보관함으로 옮기거나 영구 삭제한다. 그 내용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누구든 읽어보면 입이 덜컥 벌어질 정도다.



또한 일에 대한 열정으로 말하자면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나 혹은 제안발표회 일정이 다가오면 그 일에 완벽하게 매몰되어 며칠 동안 안절부절못한다. 그래서 퇴근 후에도 그리고 주말에도 그 고민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한 열정과 절실함이 고객사 키맨에게 직, 간접적으로 전달되어 수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먼저 고객이 제안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내부의 리소스를 총동원하여 최고 퀄리티의 제안서와 견적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전문가를 동행하여 키맨에게 당당하게 제안 컨설팅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하소연과 절실함을 한데 묶어서 고객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전략인 것이다. 나도 여러 차례 컨설팅을 동행하면서, 이런 절차로 진행하면 내가 고객이라도 형의 손을 들어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제안 내용이 확연히 차이 나지 않는 비슷한 수준의 경쟁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형의 절실함은 현실에서도 가감 없이 잘 표현된다. 경쟁이 심각하여 수주 가능성이 안갯속에서 헤맬 때는 정상적인 괘도 안에서 생활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밤을 꼬박 지새우기 일쑤다. 언젠가 한 번은 새벽 3시 30분경에 당시의 절실함과 전략을 담은 장문의 문자를 내게 보내온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거의 어김없이 다섯 시 전에 출근한다. 출근을 해서 무엇인가라도 하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형이 바보같이 일만 잘하는 워크홀릭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본인에게 부여된 휴가나 포상 그리고 조직에서 제공하는 복지 혜택은 핵심적인 요소에서부터

사소한 포인트까지 최대한 활용한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에게 직장생활의 모범적인 샘플로서 소개한 적도 많다. 그는 일에 대한 열정도 최고지만 회사에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욕심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잘하기 위한 방법들도 계속 터득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형은 약 3년 전에 회사를 대표하는 명장이 되었다. 그래서 고객들과 주고받는 명함에 명장이라는 호칭도 넣었다. 아마도 스스로에게도 더욱 성취감을 고취하는 큰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고객들에게도 보다 깊은 신뢰감을 주게 되었으며, 주변의 동료들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런데 그 명장의 임기가 3년이라, 곧 타이틀을 내려놓게 되었다. 명장의 임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재신임의 기회가 없다는 것도 납득이 안 된다. 더불어, 어떤 명장들이 그렇게 실시간으로 받은 편지함을 정리할 것이며, 또 어느 후배들이 이 절실함을 흉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제도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에게는 그가 '영원한 명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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