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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감격의 69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172 & 74. 이 숫자들이 무엇을 표현하는 걸까? 얼핏 보면 172는 IP 주소의 일부인 것 같고, 74는 누군가가 희망하는 라운딩 스코어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숫자는 지난 30년 동안 나의 신체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숫자였다. 이 두 숫자들 중에서 어떤 것은 좀 더 컸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고, 또 어떤 것은 좀 작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더 컸으면 하는 숫자는 아주 한때였고 그렇게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더 작아졌으면 하는 숫자에 대한 간절함은 오래도록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마치 지난 1년의 삶을 검증받는 것처럼 긴장감 속에서 신체계측기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중년에 접어들자 해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달라졌다. 키는 조금씩 줄어들고 반대로 몸무게는 조금씩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뱃살의 왕성한 확장력은 해가 갈수록 기세등등했다. 처음에는 어느 날 갑자기 목 주변에 생기기 시작한 '쥐젖'이나 혹은 블랙의 밀림을 비집고 하나둘씩 올라오는 '새치'같은 노화 현상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 모양이 점점 풍선처럼 둥글어지면서 보기가 흉해졌고, 이대로 넋 놓고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자 어느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되어버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운동과 담을 쌓고 살던 시기는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왕복 5km를 매일매일 걸어 다녔다. 중고등학교 때는 구도심의 골목과 언덕을 바지런히 걷거나 뛰어다녔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이나 대학교 때에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센터에서 러닝머신을 하거나 또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하는 단순 워킹으로 뱃살을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벼운 운동들은 뚜렷한 목표를 갖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또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수치적인 목푯값을 정해서 현실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69! 69kg을 성공의 수치로 정했다. 왜냐면 스무 살 이후에 한 번도 69kg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쉽지 않겠지만 그 청춘의 몸무게를 최종 목표로 정해 놓고 단계별로 진행해 보자는 거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성취해 내려면 고착화된 일상의 습관들 중에서 많은 것들을 바꾸어야 되고 또 다양한 분야에서의 인내와 절제가 필요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효과적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미 내 육체는 업무의 스트레스를 소주나 맥주로 푸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걸로 부족하면 식욕으로 풀어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결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진지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납득하는 현실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곧바로 '답'이 나왔다. '건강'과 관련된 명분이라면 통할 거 같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명분을 찾았다. 바로 '역류성식도염으로 인한 가슴통증'을 핑곗거리로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내가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위협요소가 바로 '역류성식도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신속하게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렇게 10대 실천강령을 작성해 보았다.



첫째, 일찍 일어난다. (50이 넘어서자 알람이 필요 없게 되었다)


둘째, 매일 아침 50분씩 운동한다. (가급적 매일매일 진행한다)


셋째, 운동 후에 샤워를 길게 한다. (사우나-찬물-뜨거운 물-찬물)


넷째, 아침식사는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먹는다. (해장도 양배추로 한다)


다섯째, 점심 식사에서 공깃밥은 반만 먹는다. (국물요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여섯째, 일체의 군것질을 하지 않는다. (작은 사탕도 심지어 껌도...)


일곱째, 저녁식사를 일찍 한다.(19시 30분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여덟째, 식사 후 두 시간 이내에는 눕지 않는다. (졸리면 비스듬히 기댄다)


아홉째, 일상생활에서 최대한 빨리 걷는다. (앉아 있을 때는 다리를 떤다. ㅋㅋ)


열 번째, 술자리는 최소화한다. (이 규칙이 제일 어렵고 또 중요하다. 술을 좋아하니까.)



이렇게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머릿속에 정립해 놓고, 이 규칙들을 지키려고 애써보았다. 물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면서, 10대 실천강령을 온전하게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천 확률이 6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루틴을 유지하려고 애쓰다 보니 점점 더 나아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습관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3개월이 지났을 즈음에는 그 확률이 70~75% 정도로 높아졌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5개월 동안을 꾸준하게 그 생활패턴 대로 실천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한 새벽이었다. 지하 스포츠센터 남자 라커룸에서 '이예!' 하는 기쁨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감격의 목소리였다. 오! 정말로 69! 69kg을 찍은 것이다. 혹시나 해서 체중계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서서 재확인까지 해보았다. 정확히 69.8kg이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기뻐할까?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크고 작은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어렵게 와닿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30년 만에 도전하는 이 목표에 대해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앞섰다. 그런데 점점 목표에 다가가니 그 자체가 설렘과 성취의 직접적인 매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가 예상했던 기간보다 훨씬 짧은 기간 내에 목표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상의 성취야말로 '파이팅'의 주먹을 쥐며 감탄사를 터뜨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널브러진 시간들, 이 부대끼는 사람들, 이 무의미한 분주함 속에서 자아를 만족시키는 사사로운 감동의 소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애써 즐기고 느껴야 한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개인마다 그 몫과 수량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에서 도전하고 즐길 거리를 한두 개씩 찾아보자. 소박한 감동의 요소들을 찾아서 느껴보자. 69.8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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