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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행복한 할아버지들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행복은 대문간(大門間)에 까치발로 서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거나 뒷동산 언덕배기에 올라 하염없이 동구 밖을 바라본다고 해서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인생살이의 지상 최고의 대명제는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최고의 가치는 노력과 정성을 통해 꼼꼼하게 하나둘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이라는 선물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건 진짜 행복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의 지원과 도움으로 인해 행복을 얻었다면 그것 또한 가짜 행복일 것이다.



나는 최근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행복한 할아버지들을 연거푸 목격했다. 직접 그분들을 조우하기도 했고 대중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기도 했다. 그 할아버지들의 공통점은 '지금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라는 것이다. '그분들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라고 상상해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 지나온 시절과 상관없이 그분들은 '지금 행복한 할아버지들'이었다.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들의 일상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행복한 현재를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노후의 삶에 이들의 행복한 삶이 참고가 되길 바란다.



여름휴가로 여수 여행을 결정한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2박 3일 동안 먹고 놀기로 했다. 네 번째 여수 여행이지만, 이번 여행이야말로 여수의 다양한 진면목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풍성한 구경 일정 중의 하나로 '여수섬섬길'을 시티투어버스로 관광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여수섬섬길은 2026년에 여수에서 개최되는 '여수세계섬박람회'를 위해 여수 돌산에서 고흥 영남까지의 11개 섬을 잇는 해상교량을 통칭한 것이다. 시티투어버스에 오르자마자, 어떤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익숙한 자세로 마이크를 들었다. 그러고는 이 여행 코스의 기원과 특징 그리고 여수의 대표 먹거리와 관광지를 꼼꼼하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약 7시간 동안 5개의 대교를 비롯하여 총 7개소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모든 관광객들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초집중하고 있었다. 고차원의 농담과 전설 같은 역사들을 곁들여서 맛깔스러운 말솜씨로 안내방송을 하니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여름이 절정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무더위는 36도가 넘어 불쾌지수가 극에 달해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노련한 운영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짜증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의 열정과 프로의식이었다. 오후 세 시경에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품은 '여자만'의 갈대밭과 갯벌을 둘러보는 일정이 있었다. 그런데 햇볕이 뜨거워도 너무 뜨거워서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을 했는데도 관광객들 대부분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의 두번째 권유 끝에 우리 가족을 포함한 총 7명만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 땡볕 아래에서 편도 1km가량을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상황이라면 보통의 가이드들은 해당 코스를 생략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미 윗도리가 다 젖을 정도로 무더위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일정까지 소화했다. 그리고 여자만의 풍경이 광활하게 펼쳐 보이는 둑길에서 참여한 모든 일행들에게 일일이 독사진을 찍어주었다. '아, 이 분은 가이드 직업에 분명한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존경심까지 들게 되었다. 정말 행복하게 일하시는 할아버지다.



며칠 전부터 도어록이 잘 눌러지지 않았다. 배터리 문제일까 하고 교체도 해보고, 기온이 너무 높아 발생한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며 포털에 찾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 스티커에 있는 열쇠집에 전화를 했다. 어떤 연로하신 분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현재 상태가 어떤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전화상으로 들은 내용으로 판단하면, 회로에 이상이 생겨서 발생한 고장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차피 모델명으로 보아 내용연수가 다 된 것 같다. 수리를 해서 재사용할 수 있는 확률은 5%도 안되니, 교체용 도어록 제품을 가격대별로 몇 개 들고 방문하겠다.'라고 하셨다.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장비들과 제품들을 2개의 짐수레에 가득 끌고 오셨다. 곧바로 가져온 장비들을 이용하여 15분 이상 동안 정밀점검을 했다.


얼마나 진지하게 집중하시는지 다른 말을 걸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러고는 '제가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회로 이상이 심각해서 더는 기존 제품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제가 가져온 가격대별 4개의 제품 중에서 선택하셔서 설치하셔도 되고, 다른 제품을 알아보셔도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프로다운 대처와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장인 정신으로 일하시는 프로 할아버지다.



회사의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별도의 공간에 제안룸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기존에 있는 사무가구 외에 책상 2개와 의자 2개를 별도로 옮겨야 했다. 이 애매한 분량의 짐들을 옮기기 위해 용달차를 부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반 승용차로는 공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다마스퀵이었다. 그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았다. 가까운 업체를 검색한 후 전화를 했다. '네, 30분 내로 도착 가능하며, 요금은 저희가 짐을 상차, 하차해 주면 4만 원, 직접 하시면 2만 원입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정말 30분도 채 되지 않아 카니발 차량이 도착했다. 트렁크를 열어보니 2열 3열을 짐칸으로 개조한 차량이었다. 이윽고 할아버지 두 분이 웃는 표정을 하고서 내리셨다. 그러고는 몇 마디의 구령과 함께 호흡을 맞추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책상 2개와 의자 2개를 싣고는 곧바로 출발하셨다. 손발이 착착 맞아야 가능한 계산된 동작들을 통해 아주 능률적으로 일하고 계셨다. 물건들을 목적지에 내려놓고 사무실로 돌아가서 잠시 중단했던 장기나 바둑을 마저 두실 것 같았다. 정말 효율적으로 일하시는 호흡 척척 할아버지 듀엣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이 프로그램 속에는 열심히 살아가는 행복한 할아버지들이 정말 많이 출연했다. 36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산속에 들어가 장풍 수련을 하고 있는 강수상(강키호테) 할아버지도 계시고, 무술 종합 18단으로 동물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죽을 때까지 일하며?' 살겠다는 헬로우 미스터장 할아버지도 계시며, 뛰어난 손재주로 풍향계, 물뿌리개, 개밥통, 도르래 같은 발명품을 뚝딱 만들어내는 노석환 할아버지도 등장한다. 또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생각으로 '그날그날 재미있게 산다'라는 정민영 할아버지도 계시고, 하루에 1억 원어치의 행복을 누리고 살기 때문에 내 연봉은 365억이라는 심정규 할아버지도 계시고, 시 쓰는 베짱이로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응선 할아버지도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569편의 프로그램 속에는 독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들이 참 많다. 정말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할아버지들이다.




그리고 행복한 할아버지를 소재로 이야기하면서 이 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시대의 어른' 김장하 할아버지다. 그가 평생 동안 장학사업을 펼쳐온 이유를 이야기하면 그분의 인생관과 품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들에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해 주셨고, 그들은 다양한 김장하 키즈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에서 '대학 가서 공부 안 하고 데모를 해서 죄송하다'라고 하니, '그 역시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며 격려해 주고, '장학금을 주셨는데 특별한 인물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라는 이에게는 '힘 있는 자들이 겁나는 데가 없이 설치면 사회가 몰락한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해 간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 한국 사회 전체가 두고두고 새겨들어야 할 진짜 어르신의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신 최고 품격의 어른 할아버지다.



이 할아버지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지켜보면서 나는 몇 가지의 단어를 떠올렸다. 첫 번째는 변함없는 소신이다. 두 번째는 크고 작은 봉사정신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자신을 향한 진솔함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 연상된 장면에 '힘 있는 자들이 겁 없이 설치면 사회가 몰락한다'라는 말이 커다랗게 자막으로 새겨졌다. 이 행복한 할아버지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리더'이자 고마운 '어르신'이 아닐까?



P.S.

김장하 선생님은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라고 말씀하셨다.


20~30년 후 이런 모습으로 늙어가기에는 '이번 생은 이미 글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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