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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택시비와 소주값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대학시절부터 알바로 시작하여 약 35년 동안 학원을 운영해 오던 누나가 이번에 그 역사적인 학원을 접었다. 자형과 함께 양산 사송 신도시에 JJ스크린골프장을 창업했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드는 우리나라의 출산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난주에 정식으로 오픈했는데, 내 마음이 잠시 엉뚱한 번뇌에 휘말려 당일에는 내려가 보지 못하고 오늘 일찍 가보기로 한 것이다.



성남 분당에서 사송까지의 당일치기 여정이다. 이미 고속철도로 인해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접어든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 결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5시에 일어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실은 3시 20분에 잠이 깼으나, 일어나지 않고 누워있으니 다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또 혈압약을 먹고 이어폰, 휴대용 키보드, 거치대 등 필수품들을 가방에 챙겨 넣으니 어느새 6시가 다 되었다. 얼른 신발을 신고서 수서역으로 데려다줄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수서역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6시 45분! 고속열차가 출발하기 20분 전이었다. 아침식사로 군고구마를 하나 사 먹을까 아니면 김밥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속이 불편한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알로에 스틱과 생수로 때우기로 했다. 고속열차는 정말 훌륭한 교통수단이다. 전국을 완벽하게 일일생활권역으로 만들어주었다. 동대구역에서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핸드폰으로 울산역에서 사송까지의 추가 여정을 검색해 보았다. 가장 최단 시간 코스는 울산역에서 3000번 버스를 타고 3 정거장을 가서 다시 12번 시내버스로 갈아타는 거였다. BIS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버스 운행정보는 정확했고 정말 유용했다.




울산역에 내리니 9월의 청명한 하늘이 나를 맞이해 주었고, 아직 햇볕이 따갑기는 했으나 애써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적인 여유를 알아보기 위해 다시 인터넷을 확인해 보니, 3000번 버스가 방금 울산역을 통과했고 그다음 버스는 37분 후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잠시 다른 교통수단을 고민하다가 이 낯선 지방에서의 낯선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버스가 도착하기 12분 전, 7분 전 그리고 2분 전이라고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보면서 3000번 버스 정류소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할 즈음해서는 착용했던 이어폰도 뽑고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도 재활용통에 버리고서 버스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해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았다. 거리뷰 보기로 이미 확인까지 한 그 정류장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버스가 오지 않은 것이다. 다시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이미 시스템에는 38분 후에 다음 3000번 버스가 도착한다는 정보를 표시해 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다시 38분을 기다릴 수도 없을뿐더러, 그 버스가 이 정류소에 도착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도 없었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잠시 머뭇거린 후에 택시 승강장으로 달려갔다. "내송큰들로 112번지로 가주십시오. 그런데 사장님! 여기서 3000번 버스를 40분 동안 기다렸는데, 결국 오지 않아서요. 여기 말고 다른 정류소가 있습니까?'라고 했다. 기사 아저씨는 잠시 나를 다시 보더니 음성인식으로 목적지를 말하고는 "나는 버스정류소는 잘 모릅니다. 이 외딴곳에 고속철도역을 개통해 놓고는 아직도 연계되는 도로는 엉망이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이내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후보로 단골처럼 등장하던 OOO이라는 인물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홍보하기 시작했다. 입가에 거품을 물고서까지 말이다. "내가 장트러블 때문에 우유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는데요. 그분의 사진을 구매하여 우유팩에 붙였더니, 며칠 동안 실온에 있었던 우유를 마셔도 아무 탈이 안 나더라고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꼭 그분의 사진을 구매해서 재미 삼아 서라도 한번 해보라며 절실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뿐 아니라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약 30분의 시간 동안 아주 과격한 언어와 욕을 섞어가며 한국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정치인을 바라보는 견해는 정말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나의 감각은 주변의 신선한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들을 구경하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그렇게 열띤 정치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택시가 떠나고 문자로 날아온 결제금액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헉! 44,000원이었다. 내 인생에서 지불한 최고의 택시비였다. 물론 택시를 타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결심도 놀라웠지만 그 결과물인 택시비는 더욱 놀랐다. 버스를 갈아타면 약 1시간 30분 소요되는 거리를 30분 만에 왔으니 그 정도의 비용은 투자할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에게 어울리지 않은 선택인 건 분명했다. 내가 평소 걷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비교적 검소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사송제이제이스크린골프장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누나와 자형의 얼굴을 보면서 안심이 되기도 하고 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두 분이 직접 결정하고 운영하는 사업이니 분명 대박이거나 대박에 버금갈 정도는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해 성심을 다해 응원할 것이며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릴 것이다. 몇 시간 동안 SNS를 통한 동호회 활동 및 자체 이벤트 행사 추진 그리고 골프 시그니처 포스터 설치 등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주고받고는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했다.




3000번 버스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복귀하는 길은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내송큰들로 112번지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역행을 하여 부산 지하철 남산역으로 가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이동한 후 거기서 고속 열차를 타고 오는 여정이었다. 역행을 하지만 총 소요시간은 오히려 감소했다. 게다가 부산역에는 '돼지국밥'이라는 먹거리가 있지 않은가? 평상시에는 웨이팅 대기줄에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던 OO국밥집으로 향했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대기줄이 없었다. 자리에 앉아 수육국밥과 소주 1병을 주문하고서 내부 정경과 메뉴판을 사진으로 남겨두려고 하다가 소주값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와우! 4,000원이었다. 그 착한 가격에 한번 놀라고 또 첫 잔을 들이켜고는 새우장에 찍어 먹는 수육맛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아마 44,000원의 택시비는 내 인생에 자주 없을 특별한 경우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착한 소주값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저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바다 향기와 파도 소리와 함께 말이다.




P.S.

35년간 운영해 오던 학원의 설립 당시 이름은 초인학원이었다. 나는 초인이라는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었다. 뭔가가 잘 풀리지 않을 때나 특별한 용기가 필요할 때 그 작은 간판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곤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초인학원을 찾던 그 수많은 아이들과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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