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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삐지면 나만 손해다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얼마 전에 회사내 친목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모든 참가자들이 균등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또 균등하게 휴식과 음식을 제공받는 자리였다. 누군가는 고기를 굽고 또 누군가는 식탁을 차리고 누군가는 채소를 씻고 누군가는 후식을 미리 준비하느라 모두가 분주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 누군가가 장바구니에서 숙취해소제를 꺼냈다. 그런데 참석자는 일곱명인데 숙취해소제는 여섯 개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하나씩 드세요. 저는 따로 챙겨 먹으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여섯 명이 동시에 하나씩 집어 들더니 원샷으로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약간 속상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삐진 것이다. 물론 술자리였기 때문에 각자의 건강이 우선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나였다면 한번쯤 양보를 하거나 아니면 '절반' 정도 마신 후에 병을 건넸을 것이다. 아니 그런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게 진정한 친목이기 때문이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삐져있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 보면 별 일이 아니다. 그들이 무슨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겠는가? 아니 그 상황에 대해 작은 의미라도 부여했겠는가? 단순히 내 몫을 차지하려는 본능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삐짐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은 상처받는 당사자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와는 다르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삐지는 사람들을 상당 부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삐진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것에 비해 섭섭하거나 불만족스러울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는 처음 본 사람이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애인이나 부모 등 일반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나타나는 반응인 것이다. 그렇게 사랑과 신뢰를 전제로 한 대상이기에 무엇인가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기대가 의외의 결과를 가져올 때 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 누적이 될 때 관계는 단절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삐짐 자체가 착각이나 오해로 인한 잘못된 결과인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시대를 돌이켜보면 미디어나 통신이 발달이 되지 않은 시대에는 그런 삐짐 자체가 인간관계에서의 귀여운 반응으로 희석될 수도 있고 또 오래가지도 않았다.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어떤 재미와 흥밋거리 그리고 놀이문화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을 넘어 AI 시대에 살고 있다. 굳이 인간관계에만 몰두하지 않더라고 단말기를 통해 다양한 욕구와 오락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활발한 대인관계가 아닌 최소한의 소통만으로도 가능해진 시대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혼자라는 것이 익숙한 문화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결국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져도 일상생활하는 데 크게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심심함이나 호기심을 달래줄 수 있는 요소들이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불가능한 일이 거의 없다. 영화를 보고 싶거나 음악을 듣고 싶으면 다양한 기기의 결합을 통해서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으며 그 콘텐츠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이런 시대에는 삐져있을 이유도 없을 뿐더러 삐지면 진짜 나만 손해인 것이다.



#1. 친구 모임이나 동호회 등 개인적인 친목모임에서 삐지는 것은 자신의 기분과 경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임들도 최근에는 실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각종 친목 모임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누리기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이다.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 회원들끼리 혹은 지인들끼리 윈윈 하기 위한 실질적인 거래가 생기기도 하고 특히 심리적으로는 내 사회생활의 활동성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이 싫지만, 친목모임도 그렇게 흘러가는 추세다. 그러니 동일한 회비를 내고 또 비슷한 기대를 갖고 있는 모임이라면 삐져 있는 시간이 더욱 무의미하고 자기손해인 것이다.



#2. 직장은 그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적당하고 형식적인 관계 설정이 필요한 집단이다. 특히 동료 상호 간에 진정성 있는 도움이나 협조체계가 갖춰지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더욱 지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 상사를 안주 삼아 술자리에서 씹는 행위는 이미 구시대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그렇게 격하게 상사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위로하고 공동의 대응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직장문화가 확 달라졌다. 지금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오히려 직속 상사와 얼마나 많은 공감대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상사가 일방적으로 일을 지시하거나 혹은 결재를 하는 획일적인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미션을 함께 수행해 나가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도 직장에서 상사를 안주로 활용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이미 주류에서 벗어난 직원일 가능성이 많다. 삐지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모르는 채 말이다.



#3. 가족 구성원 중에서 형제자매 간의 친밀도는 집안마다 다르다. 그러나 보통 남자 형제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 국면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여자 형제들은 누구보다 절친이 되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다. 삐짐의 강도와 그 결과도 마찬가지다. 남자 형제들은 자주 삐지지는 않지만 한번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형제 관계가 멀리져 버린다. 그러나 자매들은 작은 일로 다투고 섭섭해하다가도 금방 풀어진다. 삶에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며 살아간다. 삐지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여자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일까? 주변의 이웃이나 지인의 가족들을 살펴보라. 그리고 자신의 집을 돌아보라. 아마도 대부분의 집안이 비슷한 형국일 것이다.



#4. 몇십 년을 함께 살아가다 보면 부부는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그래서 어쩌다 한번 삐지는 것도 잠깐의 한숨으로 묻혀 버리지만, 보통은 삐지기 직전에 사전 대처를 해버린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섭섭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떤 포인트에서는 참을 수 없는지 등에 대해 말이다. 그래서 노부부가 의지하며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효심이 남다른 든든한 자식이나 함께하는 좋은 이웃 혹은 정기적으로 만나는 각별한 친구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서로에게서 눈을 뗄 일은 줄어들고 서로를 위해 등과 허리를 두들겨줄 일만 남기 때문이다. 부부의 삐짐은 그 자리에서 바로 털어버려야 한다.



#5. 누군가와 싸움을 하고 화해를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다. 그 상대방과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어떤 같은 공간에서 다시 마주해야 할 사람이거나 혹은 모임에 가면 다시 봐야 할 사람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그 불편한 상황으로 인해 신경이 쓰이고 그것이 쌓이면 누구든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세상을 넓은 아량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먼저 화해를 시도해서 그 애매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은 것이다. 어차피 계속 볼 사람이라면 삐져 있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저 상대와의 일정한 거리만 유지하면 된다. 사람에 따라 자신의 기대치를 1에서 10까지 다르게 설정해 놓으면 된다.




뜻밖의 행운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 생명과 소중한 시간들을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보내느냐는 오롯이 각자에게 달려있다. 지금 내가 머무는 이 시간과 공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나만 손해다. 아니, 그 모드가 확장이 되어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손해를 끼칠 수 있다. 당장 내 가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내 친구들에게도 신뢰가 떨어지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만의 손해에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삐질만한 일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 그리고 소통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삐져야 한다면 한나절을 넘기지 말자. 삐지면 나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결국 함께 살아가는 모두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P.S.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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