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이런 날도 있다.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아직 정오도 안되었는데 몇 발자국만 걸어도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가끔씩 매미들이 무작정 울어대는 소리가 들릴 뿐 도심 전체가 이 극심한 더위에 숨죽여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몇 해전 지방의 OO 재개발구역에 매입했던 작은 아파트의 공가 처리를 진행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서류를 발급받아 등기로 발송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주센터에서 몇 개월간 계속해서 독촉 전화가 오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꼭 부담을 덜어버리고 싶었다. 숨이 턱턱 막혀 밖으로 나가기가 겁이 날 정도로 무더웠지만 오늘은 꼭 해결하기로 했다.
총 7가지의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이 중에서 등기부등본은 오후에 사무실에서 인터넷등기소를 통해 출력하기로 하고, 우선 나머지 6가지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가까운 A행정복지센터로 향했다. 물론 나는 비교적 꼼꼼한 성격이니 출발하기 전에 책상 서랍에서 확실히 신분증도 챙겼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무더위 때문인지 행정복지센터 주변은 매우 한가했다. 민원실도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여유 있게 번호표를 뽑아 들고 대기석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런데 앞 창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엄청난 분량의 서류들을 쌓아놓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이미 차지한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약 15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그제야 대형 바인더 2개 분량의 서류들을 팔로 감싸더니 후루룩 달아나버렸다.
난 아주 간단하게 6가지 서류만 떼면 되니, 빨리 발급받고 나서 점심이나 먹자는 생각이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신분증과 필요서류 리스트를 창구의 공무원에게 건넸다. '어! 선생님! 이 신분증은 사용할 수가 없는데요. 이미 이 신분증 이후에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으셨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 그래요? 제가 책상 서랍에 있길래 챙겨 왔더니 그게 예전 거였나 보네요. 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 '네, 모바일 신분증으로도 가능합니다.' '아, 제가 PASS 앱에 등록해 놨었는데, 잠시만요. 아... 그런데 이상하게 패스워드가 틀리다고 나오네요. 다시 오겠습니다'
이미 정오가 지나 한층 더 뜨거워진 햇볕을 뚫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도착하자마자 유효한 신분증을 챙겨서 근처에 있는 B행정복지센터로 갔다. 너무 더워서 빠른 걸음으로 민원실로 들어가려는데 그 입구에서 오랫동안 시청일을 함께 진행했었던 지인을 만났다. 현재는 그 행정복지센터의 동장님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박카*를 한 병씩 따서 마시며 이런저런 소재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곧장 필요한 서류들을 발급받고 돌아와 차에 앉았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발급받은 서류들을 점검해 보았다. 그런데, 제출해야 할 서류가 뒤 페이지에 두 개가 더 있었다. 총 아홉 가지의 서류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 오늘 무슨 날인가? 내가 왜 이러지?' 하며 다시 B행정복지센터 민원실로 가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털썩 다시 앉았다. 왜냐면 조금 전에 우연히 만났던 동장님한테, '엉뚱한 신분증을 들고 A행정복지센터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여기로 왔습니다'라고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회사의 반대편 인근에 위치한 C행정복지센터로 가기로 했다. 날은 더욱 무더워지고 짜증은 이미 만땅이었지만 그 상황에서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다 내 탓이었기 때문이다. C행정복지센터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주차장이 만차였다. 인근을 두 바퀴 돌다가 겨우 주차를 하고 민원실로 들어갔다. 역시나 민원실은 텅 비어 있었고, 번호표가 발행되어 나오는 동시에 '딩동' 벨이 울렸다. 신분증과 서류 리스트를 건네며, '뒤 페이지의 2가지 서류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더니, 금세 프린터에서 출력이 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여기 있습니다. 수수료는 2,000원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핸드폰의 OO Pay를 실행하여 인증을 한 후에 건넸다. 그런데 결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시죠' '이상합니다. 결재가 안되네요. 현금이나 일반카드는 없으세요?' '휴우. 차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그러고는 그 더위 속을 달려 캐디백에 있던 골프 지갑에서 현금을 2천 원 챙겨서 다시 민원실로 들어갔다.
이미 점심시간을 허비해 버렸지만 뭔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에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발급받은 모든 서류를 다시 한번 체크해 보았다. 완벽했다. 이제 등기부등본만 발급받으면 끝이었다. 그러면 최종 서류들을 넣고 밀봉한 후에 늦은 점심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익숙한 동작으로 인터넷등기소에 접속하여 로그인하고 신속하고 정확한 과정을 거쳐 발급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면 결제를 위한 페이지로 연결되고 신용카드 결제 및 은행 자동이체 모바일 결제 등에서 선택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등기소에서 어떤 설정을 변경해서 그런지 신용카드 결제로 넘어가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인터넷등기소를 이용해서 그런 것일까? 다음으로 자동이체를 체크한 후 실행해도 진행이 되지 않았다. 또 한 번 당황스러웠지만 제3의 방법인 모바일 결제를 선택하여 다행히 결제에 성공했다. 그리고 곧바로 출력 버튼을 눌렸다. 그런데, 갑자기 프린터에서 'R5 토너회수통을 교환하여 주십시오'라는 메시지가 뜨면서 출력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직원들이 출력물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내가 출력을 하려고 하니,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 유지보수사에 연락하여 다시 교체하는 데 적어도 한두 시간은 걸린다.
'아!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구나. 이렇게 전반적으로 뭔가 잘 안 되는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 점심을 먹을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식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무덥긴 하지만 잠시라도 뒷동산 숲에서 맑은 공기를 마셔보았다. 그래도 빠듯한 오후 일정을 소화하려면 뭔가 요기를 해야 했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났고 간단히 김밥으로 때우기로 했다. 그래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김밥 1줄 주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유리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마디가 나의 하루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아! 김밥은 다 팔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