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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한 템포 느리게 & 한 발짝 옆으로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일주일 전에 직장동료가 카센터에서 수리된 차를 찾아야 하니, 카센터와 집까지 픽업을 해달라고 해서 흔쾌히 오케이 했다. 그런데 솔직히 당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마음 한편으로는 다소 불편했다. 수리된 차를 찾아서 각각 차를 타고 그의 집에 갔다가 차를 주차해 놓고 다시 내 차로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카센터에서 내가 다소 일찍 출발하여 그보다 약간 일찍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차를 1층 출입구 앞쪽에 주차하는데, 모퉁이에서 경비원이 빠른 걸음으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주차 브레이크를 올리고는 이 상황을 빨리 설명해 주기 위해 황급히 차에서 내리면서 차 문을 확 닫았다. 그 순간 내 두 눈은 경비원 쪽을 향하고 있는데, 목 안쪽에서 '으~악~'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발사되었다. 허걱!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빼내지 못한 채, 왼손으로 힘껏 차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엄지손톱은 호두껍질을 한 가마니나 깐 듯 검게 멍들었고, 그 찝찝한 통증은 3~4일 이상 지속되다가 약 5일이 지나서야 겨우 숟가락을 쥘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정신을 집중해서 프랜차이즈 대상 제안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예고 없이 협력사 대표가 찾아와 저만치 문 앞에서 나를 불렀다. 순간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한 마음으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가려다가 책상 아래에 있는 철재 서랍장 모서리에 무릎을 정면으로 부딪혔다. 소리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어깨가 떨리는 심각한 고통으로 인해 약 2분 이상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지하 1층까지 걸어가는 길에 다리를 절뚝이는 신세가 되었으며, 퇴근 무렵까지 왼쪽 다리는 얼얼한 느낌에 멍해져 있었다.




위의 두 가지 씁쓸한 에피소드는 모두 최근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달아 발생한 이 사건들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너무 급하게 행동하여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40대까지는 아무리 급하게 행동해도 몸의 전반적인 기능이 그 돌발적인 상황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조화로운 기능들의 '실패' 상황들이 조금씩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러한 작은 해프닝보다 훨씬 큰 불상사가 발생하기 전에 내 생활방식과 삶의 자세 등을 재점검한 후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한 템포 느리게 행동하고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으로 나의 행동 방식과 생활 루틴을 재정립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한 템포 느리게 행동하기 위한 조치들부터 해보자. 먼저, 입사 때부터 시작된 아침 일찍 출근 루틴에 변화를 줄 것이다. 타고난 아침형 인간이기도 하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내 삶에서 늘 희생당하는 건 '느긋한 아침의 여유'였다. 그 여유로움이 내 정신 건강과 노후 생활에 미쳤을 긍정적인 영향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다만, 이른 아침 출근길이 선사하는 선물들도 몇몇 있었다고 본다. 이 땅의 사계절이 펼치는 다양한 새벽 풍경들에 감탄하면 출근을 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평화로운 회사'라는 엉뚱한 분위기를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업무에 대한 압박감이나 조급함을 약간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던 '안 좋은 습관'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슬슬 '여유로운 출근'의 일상을 즐겨야 할 때가 왔다.


직장 생활 25주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요일 점심시간이 되면 월요병이 찾아온다. 마치 지난 42년 동안 일요일 점심때마다 찾아왔던 '전국노래자랑'처럼 말이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월요병을 치유할 때가 되었다. 이 월요병이라는 것이 9TO6 혹은 워 라벨 등을 강조하면서 상당히 그 세력을 잃고 종식될 분위기였다. 실제로 강력한 효과를 검증받은 신약처럼 직장인들의 행복한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적 변화의 바람을 타고 매우 자연스럽게 업무의 강도가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나비효과'는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적용이 가능하지만 특히 노동 현장에서 무엇보다 확실하게 검증할 수 있다. 정부의 크고 작은 정책의 변화 혹은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의 미리 계산된 '한마디' 등이 말단 노동자들의 일상에는 큰 변화를 줄 수 있다. 이제는 아무리 그런 희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진다 할지라도 '일요일 점심부터 시작되는 회사 생각'은 훌훌 떨쳐내 버릴 것이다.




이제 약속시간에 미리 가서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업무적인 약속이든 아니면 개인적인 약속이든 늘 한참을 먼저 가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약속 이전의 일정을 줄이면서 좀 더 일찍 출발해야 하고, 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 시간들을 의미 없이 흘려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 시간들이 100%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고 또 남는 시간들을 역으로 잘 활용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서는 한 템포 느리게 행동할 여건도 충분히 조성되어 있다.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면 5분 이내로 도착 시간을 조절할 수가 있고, 앞으로는 내 현재 위치와 이동 상황에 대해 상대방에게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속시간에 맞추어 움직여도 문제없다.


한 템포 느리게 행동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운전 습관'의 변화이다. 몇 달 전 출장 업무가 겹쳐서 타 부서의 직원들 차량으로 수도권 인근까지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 차량의 엔진은 6 기통이었는데, 운행하는 내내 마치 최근에 출시된 2인용 미니카처럼 조심스럽게 달렸다. 목적지로 가는 내내 너무 답답했다. 게다가 그는 양보운전의 대가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슬쩍 물어봤다. "선배님! 안전운전 습관이 몸에 배어 있으신 거 같아요."라고 하니. "오늘 좀 답답했죠? 그런데, 저도 이렇게 운전한 지 몇 년밖에 안 됐어요.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그 선배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몇 년 전 교통사고를 크게 낸 적이 있어요. 다행히 인명사고는 아니었지만, 난 그날 이후 안전운전을 목숨처럼 생각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그 습관이 너무 좋아요. 부장님도 시도해 보세요."라고 말이다. 나는 당장 '안전운전 모드'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템포 느린 모드'를 설정하고 운전해 볼 생각이다.




다음은 한 발짝 옆으로 비켰다가 출발하기다. 여태 정면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 달리기의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른다. 달리다가 지나치는 많은 정류소들 중의 하나가 목적지가 될 수 있고 혹은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샛길로 들어서야 목적지가 보일 수도 있다. 이제 직장에서도 '한 템포 늦추는 숨 고르기'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위쪽을 지향하면서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를 쓰던 건조한 줄다리기에서 손을 놓을 때가 되었다. 직장에서의 승진이라는 단어를 이미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직책'이라는 허울을 벗고 살포시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총대를 메고 있는 동호회나 친목모임이 모두 6개다. 너무나 다양한 이유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임이고 또 풍요로운 삶이라는 특별 요리에 아주 다양한 양념 역할을 할 사람들이라 당장 탈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제 1~2개의 모임을 제외하고 다른 분들에게 그 '총대'를 넘겨줘야겠다. 그 모임에 대한 유지 의무와 운영 책임도 이제 조금씩 건네주고 한 발짝 옆에 서서 성실한 참여자로서 바라봐야겠다.




미리 정해놓은 원칙이 지켜지는 것이 좋았다. 순서를 지키는 질서 있는 환경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이 도시에서 살면서 내 앞자리와 내 뒤를 많이 보지 않고, 모든 사람을 그저 동일한 '존재'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힘이 더 필요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배려와 안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양보해야겠다. 나보다 바쁜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게 우선권을 줘야겠다. 진심으로 우러나는 안부의 말 한마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슴지 말고 건네야겠다.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서야 할 것들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술자리다. 특히 의미 없는 술자리. 중년 직장인들 중에서 음주를 좋아하는 유형이라면 스스로 약간의 '알코올 중독'이라는 느낌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달려서 힘들어지면 '이제 술은 끊는다'라고 다짐하며 잠들었다가도 다음날 퇴근 무렵만 되면 '첫 잔이 내장을 타고 흐르는 그 짜릿함'이 스멀스멀 뇌를 자극해 오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반) 환자 대열에서 한 발짝 물러서야겠다. 그 비린내 나는 골목을 탈출하여 햇살로 가득한 광장을 힘차게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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