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나에게는 36년 묵은 친구가 있다. 고교 1학년 까까머리로 만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초고속으로 절친이 되었다. 당시 무엇에 꽂혔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내가 앉아서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다락방을 내 방으로 활용하고 있던 그 무렵에 그는 부산 OO동 전망 좋은 언덕의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고, 소위 '부잣집' 아들이지만 인생의 의미와 재미를 바라보는 방향이 나와 같았던 것 같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되었다. 정말 후회 없이 징하게 놀았다. 학교와 우리 집과 그의 집을 잇는 트라이앵글을 중심으로 마치 중요한 유적을 탐사하듯 이 골목 저 골목을 점령하였고, 광안리 바닷가와 범내골 기찻길 계단에 앉아 목청이 터지도록 노래했고 또 어느 날에는 특별한 목적지 없이 무작정 달리고 또 걸었다. 함께 마신 술병과 음료수 병을 모았으면 그 크기가 웬만한 뒷동산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진지한 주제에 대해서는 밤을 새워 토론하고 언쟁하기도 했다. 그때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시기였고, 현실과 이상을 놓고 그 타협점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항상 그 대화의 소재들이 무거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가치관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매우 비슷한 유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아예 다른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먼저 비슷한 점은 스포츠와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고, 가족에 대한 유별난 애정이 있으며, 친구들과 오래도록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뭔가에 한번 빠지면 비교적 쉽게 중독된다는 것이다. 또한 확실하게 다른 점은 그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고, 나는 문학과 언어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숙이와 결혼했고, 나는 정옥이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를 '행국아!'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행국이와 형국이 사이에는 어떤 다른 캐릭터 혹은 다른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결혼을 하기 전엔 행국이로 살았다가, 결혼 후에는 형국이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혹은 행국이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개인이고, 형국이는 가족, 동료들과의 공동운명체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문득 행국이라고 쉽게 부르고 싶다가도 혹시나 그에게는 그 이름이 가볍게 들려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어쩌면 그 이유보다는 다른 친구들이나 주변인들이 그 이름을 듣고서 뭔가 '장난스럽게' 생각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술 한잔하고는 그저 '행국아!'라고 불러보고 싶다. 그렇게 불렀을 때, 딱 '내 친구'인 것 같아서 그렇다.
그는 오래전부터 여섯 명으로 구성된 '친구들 모임(Never)'에서 대체 불가능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여섯 명 모두가 개성이 각양각색이고, 함께하게 된 인연도 다양하지만 마치 '큰 뜻을 함께한 동지' 혹은 '삶의 동반자'와 같은 마음으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그가 그렇게 다양한 관계와 유형을 아울러 반영구적인 베이스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토대가 무엇일까? 먼저 희생정신이다. 수없이 이어지는 갈등 상황에서 특정인의 희생과 양보가 없었다면, 어느 순간 그 누적된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을 것이다. 또 하나는 자부심이다. 스스로에 대한 크고 작은 자부심 그리고 각 구성원들에 각각의 자부심들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솔함이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거짓'이 버텨내긴 힘들다. 아주 사소한 거짓도 마음속에 저장되어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36년 동안 그렇게 '진짜'였다.
우리는 당시 서로의 가족들과도 수많은 에피소드를 경험했다. 고2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 수많은 내용의 대화들을 많이 하다 보니, 각자의 과거 경험들이나 고향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겨울방학이 되어, 내가 고향인 지리산 인근에서 가족들과 함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엄동설한의 유난히 추운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이장님이 눈 쌓인 빙판길을 미끄러지듯 달려 황급히 고향 집으로 오셨다. 부산에서 남학생 2명이 OO 마을에 찾아왔는데, 다짜고짜 OOO을 보러 버스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 친구들로 확인되면, 마을 이장님이 벌목용 '트럭'으로 태워다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있느냐며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쨌거나 두 분 이장님들의 재치와 시골 인심이 잘 결합되어, 그날 저녁 늦게 두 남학생은 무사히 나의 고향 집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온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 에피소드의 원인은 내가 제공했다. 내용인즉, 내가 평소에 '지리산 OO 면에 가서 내 이름을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라고 했던 말만 믿고 무작정 지리산행 시외버스를 탔던 것이다. 그러고는 우리 마을의 정반대 편에 위치한 엉뚱한 마을에 들어가 'OO 면에 사는 OOO을 찾아왔습니다.'라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을 텐가? 다행히 우리 마을이 O 씨 집성촌이라 OO 마을 이장님이 기지를 발휘해서 우리 마을 이장님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정말 한없이 무모하지만 또 한없이 순수한 청년들 아니었던가?
고3이 되어 어느덧 대입시험을 치러야 할 시기가 왔다. 당시 예술과 스포츠에 심취했던 우리는 수도권 대학에 응시를 하기에는 좀 많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우리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보자! 아니, 도전이라도 해보자!'라는 얘기를 꺼냈고 바로 합의했다. 그러고는 둘이서 자신만만하게 출정을 선언하고는 무궁화호를 타고 상경했다. (*그때 우리의 고3 담임선생님이 어떤 이유로 그 서울 소재 OO 대학교의 응시원서를 써줬는지 알 수가 없다. 기가 막혀서 그냥 사인해 줬을까? 아니면 워낙 강력하게 주장하니 미달이라도 고려했던 것일까? 내 삶의 불가사의 중 하나다). 서울역에 내려서 형국이 고모님 댁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지하철 안에 있는 많은 서울라이트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계속 우리를 쳐다보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내릴 때쯤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입을 닫으면 쳐다보지 않고, 말만 하면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ㅋㅋ. 서울 사람들에게는 까까머리 부산 청년들이 혹은 정겨운 부산 말씨가 그토록 신기하게 보였을까? 드디어 의문의 지하철에서 내렸다. 무작정 찾아간 형국이 고모님 가족들은 무작정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날 저녁 서울 사람들의 서울밥을 먹고, 호텔 침구와 같은 싸늘 따뜻한 하얀 이불속에서 짧은 잠을 잤다. 그러고는 다음날 다시 늠름한 자세로 대입 시험에 응시하러 출발했다. 그날 시험이 어려웠었는지 쉬웠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아주 가볍게 시험을 마치고는 곧장 광화문역으로 달려가, 광화문 네거리를 걸으며 '광화문 연가'를 불렀다.
지난 36년을 돌이켜보면, 형국이는 단 한 번도 나의 제안이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말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형'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니 갑자기 이런 추억과 상황이 매우 진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언제든 잡아줄 것 같은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이 내 삶을 벅차게 한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나 또한 그랬을까? 그의 제안이나 부탁을 나 또한 단 한 번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았을까? 불현듯 그런 기억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봐 걱정된다.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의리'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의리'라고 하는 순간 뭔가 인공적이거나 의도된 듯한 뉘앙스가 풍겨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 평범하게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애써 표현하지 않고 그저 챙겨주는 마음이 좋다. 이렇게 '오랜 친구 한 명을 어떻게 부를까'로 시작된 의문이 약 2시간을 투자하여 옛 추억들을 소환하면서 글로 쓰다 보니 저절로 해결되었다. 결국 '행국이라 부르는 것과 형국이라 부르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
P.S.
이 글의 중반부에 대입시험 전날 형국이 고모님 댁에서 짧은 잠을 잤다고 언급했다. 내일의 거사를 위해 일찍 잠들지 못하고 밤늦도록 뭔가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다. 어쩌면 몇몇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입시험을 본 지 어느덧 35년이 흘러 50대 중년이 된 이 시점에 뭔들 못 밝히겠는가? 그날 밤 고모님과 딸 그리고 형국이와 나 넷이서 늦은 밤까지 재미나게 놀았다. 소위, 고스톱을 쳤다. 그 결과 대입시험을 볼모로 여기저기서 끌어모았던 '입시 비용'을 악덕 고모한테 고스란히 날리고는 결국 둘 다 '오링'이 되었다. ㅋㅋ. 물론 다음날 아침 잃어버린 돈의 2배를 회수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