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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나를 사랑하는 법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주말에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위아래로 스캔하다가, 예능 골프 프로그램의 한 장면에서 멈췄다. 개그맨 양 OO 씨 등 연예인과 이 OO 씨 등 운동권(?) 출신 연예인들이 상당한 실력과 흥미로운 입담으로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엮어가고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에 골프 문화가 나이와 지역을 초월하여 전국민적으로 확산된 탓에 프로그램 구성이 다소 밋밋하고 심심해도 어느 정도 시청률이 유지된다고 한다. 그만큼 골프가 대세인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킥킥대며 TV 예능을 지켜보다가 몇 가지 반복되는 장면을 보고는 깜짝 놀랬다. 개그맨 양 OO 씨가 반복하는 아주 독특한 행동 때문이었다. 본인이 친 샷의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매우 즐거워하며 자신의 팔목에다가 '잘했어. 잘했어'라고 말하며 뽀뽀를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제스처였다. 그 광명을 몇 차례 지켜보며 '와우! 저 연예인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칭찬하는구나. 저 사람의 인생은 참 풍요롭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며칠 후 저녁에는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최종 순위를 결정지을 중요한 경기들이 전국의 5개 구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최근 타격 페이스가 침체되어 좀처럼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그 중요한 경기마저도 이미 상당한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다. 게다가 협탁에는 맥주가 2캔 째가 되다 보니, '아! 저 감독은 요즘 감이 많이 떨어졌어. 이 순간에 위험하게 도루 작전을 감행하다니... 아! 쟤는 왜 아직 은퇴를 안 하나 몰라'라면서 온갖 푸념과 질타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독백으로 말이다. 감독의 오판에 의한 도루사로 원 아웃, 허무한 삼진으로 투아웃이 된 상황에서, 가끔씩 예상치 못한 뜬금포를 쏘아 올리는 B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타석에 서서 투수를 바라보는 자세와 눈빛이 뭔가 해낼 것 같았다. 야구는 분위기와 흐름의 스포츠이다. 역시나 상대방 에이스 투수의 초구를 받아쳐서 담장 한가운데를 훌쩍 넘겨버렸다. 내 몸속에서 도파민이 폭발한 것처럼 흥분이 느껴졌다. 그렇게 박수를 치다가 다이아몬드를 돌고 있는 B 선수를 바라보았다. 그 선수는 3루를 돌면서 양손에 깍지를 끼고서는 이마, 코, 입에 대었다가 하늘로 들어 올리는 홈런 세리머니를 하는 것이었다. 그 표정과 몸짓에서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극도로 기뻐하며 스스로를 축하했다. 아! 저렇게 뭔가를 해냈을 때, '내가 나를 응원하고 내가 나를 격려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직장을 정년퇴직하고서 약 2년간 공부를 하더니,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선배가 있었다. 그분을 포함하여 몇몇이 어울려 어렵게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약 30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생생한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자격증 시험 합격 후에 정말 크게 감동했다'라며 그 과정들을 속속들이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내가 말이야. 거울 앞에서 서서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이번에 합격 통지를 받고서 식구들과 외식을 하다가 잠깐 화장실에 갔는데, 커다란 거울이 내 앞에 보이는 거야. 정면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이 약간 늙긴 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아 보이는 거야. 그래서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말했어. "너 이번에 참 잘했다. 정말 수고했고 진짜 자랑스럽다."라고 말이야.'




내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은 프리랜서 스타일의 업무가 맞는 것인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을 약 여섯 번 정도 옮겼다. 그런데 그는 일상생활에서 독특한 습관을 갖고 있다. 매월 혹은 수시로 본인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매월 급여 일마다 빠짐없이 본인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하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 놓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가벼운 술자리에서 그가 애지중지하는 태블릿의 메모장에 잘 정리된 '나를 위한 선물 리스트'를 보았다. 그 리스트를 쭈욱 훑어보고 있자니, 그의 인생 자체가 그 리스트처럼 빼곡하게 뭔가로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정기적인 선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자랑스러운 일을 할 때마다 부여하는 특별상도 있다고 했다. 그 '간헐적 선물'까지 포함하면 리스트는 정말로 역대급 대하소설처럼 그 구성이 탄탄할 거 같았다. 내가 '그럼 그 특별 선물은 어떨 때 주는 거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응. 내가 착한 일을 할 때'라고 대답했다.




때때로 종로 인근에서 다국적기업 한국지사들과의 B2B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에 한국 OO에 근무했던 최 OO 과장님이 생각난다. 약 3년간 교류를 하면서 그와의 식사 자리는 약 여덟 차례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맨 처음 이 분과 점심 식사를 하러 간 곳이 서대문 쪽의 'OO 해장국' 집이었다. 각자 전날 밤의 음주로 인해 '해장합시다.'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펼쳐졌다. 메뉴를 주문하면서부터 최 과장님이 식당 측에 뭔가를 자꾸 요구하는 것이 일반인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썬 대파와 마늘을 요구하더니, 부추도 있으면 조금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찍어 먹을 소스를 직접 만들 테니 소스 그릇을 2개 달라고 했다. 그리고 빈 그릇도 하나 달라고 했다. 작은 국자도 달라고 했다. 그 정도되니 '이 분이 여태 술이 덜 깼나?' 하고 속으로 짜증이 조금 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찰나에 최 과장님의 행동을 보고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장국 뚝배기가 2개 나오자마자, 작은 국자를 이용하여 탕 위에 떠있는 거품 덩어리와 걷어내면서 '식품연구가마다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이 거품은 우리 몸에 해롭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허허허.'라고 말하며 걷어낸 거품들을 익숙한 움직임으로 빈 그릇에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식탁 위의 간장과 마늘, 썬 대파, 부추, 고춧가루를 이용하여 찍어 먹을 소스를 식탁 위에서 직접 만들었다. 거기다가 '후춧가루'를 살짝 뿌렸다.

그러고는

"차장님! 이제 맛있게 드시지요. 제가 좀 별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닙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1순위지요."라고 거들어주니,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에이. 아닙니다. 건강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이 한 끼의 식사가 정말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차장님과는 첫 식사 자리인데 최대한 맛있게 만들어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헤. 그렇다고 종교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 행동들을 보면서 진짜 별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다가, 그 이후에도 일곱 번이나 다른 메뉴로 식사를 하면서 이 사람이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매우 사랑해서 그런 거구나'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약 15년이 지난 지금도, '식사를 대충 때운다'라는 생각으로 간편식을 먹으려고 하다가, 그분이 떠오르면 마음을 바꾸어 다시 부엌으로 돌아간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성공하자, 다른 채널에서도 비슷한 콘텐츠의 '다큐 예능' 프로그램을 경쟁하듯 내놓고 있다. 현재의 각박한 삶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위기의 사회인들이 많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남자들의 로망이자 중년층의 로망을 '자연인'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출된 로망에 이끌려 '자연인'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10%도 안될 것이다. 대부분의 '자연인'들이 산이나 섬 혹은 오지를 택한 이유는 다 그들만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의 사연은 '건강 문제' , '사업 실패' , '인간관계 문제' 등이다. 현실에서 맞닥뜨려진 문제들에 대해, '자연'에서 치유하려는 목적 혹은 사업 실패와 배신에 따른 '현실 도피' 목적이다. 그래서 그 주인공들을 '이기적인' 혹은 '가족을 외면하는'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난 그들을 다르게 평가한다. 건강이 위태로운 상태이거나, 사업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 주인공들이 선택한 자연인의 삶은 어쩌면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맞딱뜨린 사람들의 자세는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더욱 참담해질 수 있는 유혹들을 단칼에 뿌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살'이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조금 물러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훈련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적응에 성공하면 '진짜 자연'에 묻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비로소 나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도 그의 가족에게도 최선인 것이다.



내가 아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먼저, 너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 전체를 바라볼 때도 말이다. 그리고 너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단다.'라는 말이다.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이기적인'이라는 표현으로 돌을 던지지 말라. 그 돌 던지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진솔하게 사랑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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